이이제이(以夷制夷), 책을 읽다가 무심하게 내 눈에 들어온 사자성어다. 나도 그냥 무감하게 흘려보내려다가 잠시 멈칫, 마음을 바꿨다. 정말 오랜만에 접하는 것도 같고, 또 이참에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자는 의미루다 오늘의 성어로 결정! 자, 이제 어떤 한자들의 모임인지 살펴볼 차례다. 아래를 보시오. 흐미~ 웬 ‘이’자가 이리도 많노?
써 이(以), 오랑캐 이(夷), 제어할 제(制), 오랑캐 이(夷)
‘이이(以夷)’는 ‘오랑캐로써 ~’라는 뜻이다. 잘 안 와닿는다고? ‘써 이(以)’자가 수단이나 방법을 나타내니까 다른 말로 하면 ‘오랑캐를 통해 혹은 이용해’ 정도 되려나? 일단 뒤에 있는 것까지 다 보고 말하자구. ‘제이(制夷)’는 ‘오랑캐를 제압하다’겠다. 그러니까 전체적으로는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어하다’가 되겠네. 적을 이용하여 또 다른 적을 제압한다는 뜻이렷다.
군사상의 전략일 수도 있는 이이제이(以夷制夷)는 주변의 나라를 이용해 ‘어부지리(漁夫之利)’ 효과를 노리는 것을 이르는 말인 거다. 그러니까 여러 세력에 일일이 대항하기 버거울 때,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상대 세력들 간 갈등을 역이용하는 동양적 지혜인 셈이다.
중국 5∼6세기 양쯔강 하류, 지금의 남경(南京)쯤 되는 그 일대를 통치했던 남조(南朝)시대, 송(宋)나라의 범엽(範曄)이 지은 <후한서(後漢書)>에 나오는 말이다. 후한(後漢)의 역사서인 이 책의 동이전(東夷傳)에는 부여•읍루•고구려•동옥저•예•한(韓), 그리고 왜(倭)의 전(傳)이 있단다.
동이(東夷)? 왠지 익숙하쥐? 중국 동북부 지방과 한국, 일본에 살던 사람들을 가리켜 중국인이 부르던 명칭이지 않나. 동쪽의 오랑캐라니… 음… 아무튼 저 후한서(後漢書)라는 역사책은 <삼국지(三國志)>의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과 함께 한국 고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고.
후한(後漢)의 제3대 황제인 장제(章帝)가 집권하던 시기, 이민족 중의 하나인 강족(羌族)이 한(漢)나라를 공격하려 한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한(漢)나라는 등훈(鄧訓)을 파견하여 이에 대처하게 하였더라. 당시 변방에는 또 다른 이민족인 소월씨(小月氏) 호족(胡族)들이 살고 있었더랬다.
한(漢)을 바로 공격하기엔 역부족이었던 강족(羌族)은 그 근처의 호족(胡族)을 먼저 위협하였다. 등훈(鄧訓)은 이들 두 오랑캐들 싸움이 크게 번지지 못하도록 조정하려 애쓰는 게 아닌가. 조정의 책략가들은 당연히 등훈에게 노발대발했겠지? 오랑캐를 이용해 오랑캐를 제압해야지 그들 싸움을 막아서는 아니 된다고 말이지. 이때 나온 말이 바로 이이제이(以夷制夷)다.
여기서 내가 주목한 것은 등훈의 따뜻한 카리스마다. 애초에 강족(羌族)이 원한을 품게 한 원인 제공은 한나라가 한 게 아니냐며 그는 항변했다. 훗날을 위해서도 강족의 분노를 잠재우고 호족의 신뢰를 얻는 게 우선이라고. 그들을 은덕으로 감싸주어야 한다고. 그의 진심이 통했다. 결국 조정이 나서서 변방의 성문을 개방하고 호족의 여인들과 아이들을 보호하니 호족 전체가 얼마나 감동했을까. 그럼, 강족(羌族)은? 당연히 물러났겠지.
그동안 사자성어에 얽힌 여러 고사들을 보아왔지만 전장에서 이렇게 훈훈한 이야기는 참 오랜만인 거라. 모두가 주장하는 ‘이이제이(以夷伐夷)’의 전략을 버리고 위험에 처한 호족들을 살리는 그 넓은 아량이라니. 결국 등훈의 은덕이 ‘이이제이’보다 더 효과적이었음을 증명하지 않았나. 인품도 능력도 다 훌륭하다더니… 역쉬~ 등훈!!
이 고사가 뭐라고. 하하. ‘이이제이’로 한이 강족을 접수했을 거라는 내 예상을 뒤집은 스토리의 반전에 흐뭇하게 웃고 있는 나. 참나, 정말 이게 뭐라고. 이 고사의 마지막을 읽고 있는 내 마음도 덩달아 따뜻해진다.
등훈, 그대는 그 오래전에 이미 ‘타자를 환대하는 우정의 정치’를 실천한 것이구료. 참으로 멋지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