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일차_교학상장敎學相長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는 말이 있다.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에서 교수자와 학생이 함께 성장한다는 뜻이렷다. 내가 생각하는 ‘앎으로의 도상에서 만나는 가장 이상적인 배움의 상태’랄까? 이 의미는 사자성어를 이루는 한자만 봐도 금방 알 수 있으리라. 

가르칠 교(敎),  배울 학(學), 서로 상(相), 길 장(長)

‘교학(敎學)’은 ‘가르침과 배움’일 테고, ‘상장(相長)’은 ‘서로 자란다’가 아니겠나. 그러니 ‘가르치고 배우면서 서로가 서로를 성장시킨다’는 의미가 되시겠다. 이 말은 <예기(禮記)>에 나온다. 

<예기(禮記)>라 함은 49편(編)으로 이루어진 유가의 경전, 오경(五經)의 하나다. 근데, 왜 예경(禮經)이 아니고 예기(禮記)야? 오경(五經)이라며? 그렇다. 오경(五經) 중 하나면 당연히 ‘경(經)’이 붙어야 하거늘 <예기>라니… 예(禮)에 관한 경전을 보완(補完)하고 주석(註釋)을 달았다는 뜻으루다 그렇게 불렀단다. 그런데 중요한 건, <예기(禮記)>에는 ‘의례(儀禮)’의 해설 외에도 음악·정치·학문 등 다양한 영역까지 아우르며 예(禮)의 근본정신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는 사실.  

바로 그 <예기(禮記)>의 ‘학기(學記)’편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是故知不足,教然知困。知不足然能自反也,知困然能自强也。故曰:‘教相長’也。” 이런 고로 배운 연후에 부족함을 알고, 가르친 연후에 어려움을 안다. 부족함을 안 연후에 능히 스스로를 돌아보고, 어려움을 안 연후에 능히 스스로 강해지나니. 이에 가르침과 배움은 서로 성장시킨다고 하는 것이라.

‘가르침은 배움이 반’이라고? 그렇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만큼 좋은 배움은 없다잖은가. 하지만 그 ‘좋은 배움’의 경지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가르친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과정인지,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처절하게 깨닫는 게 먼저다. 스스로 모자란 부분을 찾아 더 깊이 배우는 계기가 될 테니. 이것이 가장 이상적인 배움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그래서 <서경(書經)>에는 ‘학업의 반은 남을 가르치는 동안에 이루어진다’는 뜻의 ‘효학반(斅學半)’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 ‘열명(說命)’편에 나오지 아마? 음… 저기 한자가 또 생소하겠군. ‘효(斅)’, 바로 이 글자 말이오. ‘가르칠 효’자요. ‘효학(斅學)’은 그러니까 ‘교학(敎學)’이라는 말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면 될 게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는 성어와 함께 이 ‘효학반((斅學半)’도 머릿속에 입력!!

그럼, 제자들을 많이 배출해낸 똑똑하신 공자님도 제자에게 배우는 그런 경험을 해보셨을라나? 공자는 문답을 통해 토론하면서 학생들의 생각을 이끌어내는 데 아주 능숙한 스승이었다. <논어(論語)>의 ‘팔일(八佾)’편에 보면, 공자와 그의 아주 총명한 제자 자하(子夏)가 <시경(詩經)>의 한 싯구(詩句)를 두고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제자 자하(子夏)가 질문하고 공자가 그에 답하고, 자하가 스승의 답변에 대해 또 다시 묻고 하는 과정에서 공자가 외려 예(禮)에 대해 새로운 이치를 깨닫는 순간이 온다. 그때, 공자가 뭐라 했느냐? ‘이제 비로소 자하와 더불어 시(詩)에 대해 논할 수 있게 되었다’며 아주 기뻐했다지. 

저 공자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면, 아니 저때 공자의 깨달음이 얼마나 컸던 지를 알면 예(禮)와 시(詩), 더 나아가 <예기(禮記)>와 <시경(詩經)>의 관계가 아주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게 되리라. 자하(子夏)가 시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그 시의 의미를 예와 연결시켜 풀어냈으니, 공자가 보기에 제자가 얼마나 자랑스럽고 대견했을까. 공자가 제자를 칭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하와 더불어 <시경(詩經)>에 대해 논할 수 있다고 말한 대목만 봐도 공자의 마음이 읽혀진달까. 이 과정이 스승인 공자에게도, 제자인 자하에게도 아주 큰 배움의 시간이었으니, 이것이 바로 교학상장(敎學相長)이 아니고 무엇이랴.

어디선가 읽은 것 같다. 학생이 질문할 때 그것을 받을 줄 아는 교육자는 종을 치는 것과 같다고. 이게 무슨 뜻이냐? 작은 당목으로 치면 작게 울리고 큰 당목으로 종을 치면 크게 울린다는 의미겠다. 공자가 제자의 질문을 받아 큰 당목으로 치는 소리처럼 크게 울리게 만들지 않았는가. 공자의 정신세계에서 시가 차지하는 그 엄청난 무게가 느껴질 정도로. 공자에게 있어 도(道)의 세계는 ‘생각함에 사악함(思無邪)’이 없는 어진 마음(仁)인데, 그것을 표현한 것이 시(詩)라면 말 다했지 뭔가. 

아… 할 말이 너무 많아지는데? ㅠ 나중에 <시경(詩經)>에 대한 얘기를 따로 한 번 해야할까보다. 암튼, 오늘의 성어, 교학상장(敎學相長)의 의미를 돌아보노라니 그동안 내게 그 숱한 배움을 주었던 다정한 얼굴들이 스쳐간다. 나의 감사하는 이 진심이 지금 이 순간 그 친구들의 마음에도 가 닿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