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식사를 하러 레스토랑에 가보면 과거와 달리 우리 주변에 채식주의자들이 참 많아졌다는 걸 느낀다. 메뉴판부터 다르다.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든, 동물권을 위해서든 사람들은 나름의 방식대로 비건을 지향하고 있는 듯하다. 그에 걸맞게 사회적 담론도 다양성을 인정하자는 쪽으로 자리잡혀가는 느낌이다. 바람직한 현상임에 틀림없다.
다양성의 화두를 가지고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사자성어로 표현해보면 어떨까 싶은 거다. 공자님이 비슷한 말씀을 하셨더라.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고. 이 말은 <논어(論語)>의 ‘자로(子路)’편에 나온다.
‘子曰(자왈), 君子(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소인(小人)은 동이불화(同而不和)이다.’ (공자 왈, 군자라면 중화를 지키되 동화되지 아니하고, 소인은 동화될 뿐 중화를 지키지 못한다.)
이 문장에 나오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구조를 해체해보면 이렇다.
화합할 화(和), 어조사 이(而), 아니 불(不), 같을 동(同)
문자 그대로 해석해보자면, ‘화합하되(和), 그렇지만(而) 같지 않다(不同)’가 되시겠다. 여기서 ‘화합하다’의 ‘화(和)’는 ‘다른 성질을 가진 것들이 섞여 각각의 성질을 잃거나 그 중간의 성질을 띠게 한다’는 의미에서 ‘중화(中和)’라는 단어로도 대체 가능하리라. 이렇게 볼 수 있는 이유, 즉 ‘화(和)’와 ‘동(同)’의 차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좌전(左傳)> 에 나오는 다음의 고사 속으로 들어가보자.
제(齊)나라의 경공(景公)이 안자(晏子)에게 물었다. ‘화(和)’와 ‘동(同)’이 다르냐고. 참, 안자는 제나라의 정치가이자 사상가렷다. 그가 뭐라 대답했을까나.
안자는 ‘화(和)’를 국을 끓이는 것에 비유한다. 물, 불, 초, 젓갈, 소금, 매실에다 삶은 생선이나 고기를 넣고 나무로 불을 땐다. 맛을 내는 요리사는 모자라는 것은 더 넣고 많은 것은 덜어내어 고르게 조화시켜 국을 만든단다. 그런 뒤에 군자는 이를 먹고는 기분 좋아 마음을 화평하게 가진다고.
임금과 신하 사이도 그러하단다. 임금이 옳다고 했어도 그것이 잘못되었으면 신하가 그 잘못을 말씀드려 옳게 만들어나가고, 임금이 그르다 했을 지라도 그것이 옳으면 신하가 그 옳은 것을 말씀드려 틀린 것을 고쳐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정치가 공평해져서 서로 충돌이 없고 백성들도 다투는 마음이 없어진단다.
안자는 ‘동(同)’에 대해서는 ‘임금이 옳다고 하면 자신도 옳다고 하고, 임금이 그르다 하면 자신도 그르다고 하는 것과 같다’고 일갈했다. 이는 마치 물에 물을 더 타는 격이니 누가 그 음식을 먹겠으며, 거문고의 조화가 없는 한 가지 소리만 켜는 것과 같은 격이니 누가 그 소리를 듣겠냐고. ‘화(和)’와 ‘동(同)’에서 ‘동(同)’이란 것이 옳지 않음이 이와 같다는 거다.
바로 이 고사로부터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는 성어가 나오게 된 거다. ‘화합하되 서로 같지 않은 개별성을 인정해주는 것’, 이 말인즉슨 다 같이 더불어 살면서 다양성을 인정하자는 것일 게다.
작금의 시대를 ‘다양성의 시대’라고들 한다. 그래서 그럴까? 유난히 타자, 관용, 동화, 차별, 포용, 배제, 환대 등의 단어가 귀에 자주 들리는 요즘이다. 그동안 낯선 것에 대한 막연한 경계심은 두려움으로, 그 두려움은 타자를 배척하고 경원시(敬遠視)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또한 새로운 집단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고 그 집단의 주류를 따르는 동화(同化)가 답이었다. 그뿐인가. 관용은 어디까지나 그것을 베푸는 주체의 마음에 근거하고 있지 않던가. 그러다보니 그 관용의 대상이 겪어야 하는 불안정성은 또 어떻고.
공자가 ‘화이부동(和而不同)’을 말한 것도 현명한 사람은 항상 조화를 추구하면서 차이를 포용하고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함이라. 늘 일관성만을 강요하고 조금의 차이도 용납하지 않는 편협된 사고의 결과는 표면적 조화에 불과하고 결국 갈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거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타자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는 태도가 아닐까 싶다. 더 나아가 타자와의 조우를 통해 주체의 정체성이 변화할 수 있다고 믿고 그 가능성까지도 열어놓는 태도 말이다. 우리는 이러한 실천적 태도를 ‘환대’라 부를 수 있겠다.
타자를 자기 안에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주체가 변용되고, 그를 통해 자아가 한층 고양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그러한 지향성이야말로 ‘다름’이 ‘차별’의 이유가 되지 않는, 공자가 말한 ‘화이부동’의 미덕이 구현되어 다양한 이들이 한 데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는 자산이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