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일차_곡학아세曲學阿世

‘곡학아세(曲學阿世)’라? 사전을 찾아보니 ‘그릇된 학문을 이용해 권력자나 세상에 아첨하는 모습’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생소한 성언가? 나에게만 익숙한가 싶어 다시 검색을 한 번 해본다. 와… 이렇게 많다고? 그렇다. 이 성어는 우리 일상에서 접하는 글속에 의외로 자주 등장하는 성어 맞다. 그러니 자신 있게 우리의 사자성어 목록에 올려도 되리라. 한자의 면면을 봐도 일단은 아주 간단한 글자들만 눈에 들어온다. 쉽네, 뭐~

굽을 곡(曲), 배울 학(學), 영합할 아(阿), 세상 세(世)

‘곡학(曲學)’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학문을 구부리다’가 되겠다. ‘곡(曲)’이라는 한자는 ‘굽(히)다’의 뜻도 있지만 ‘바르지 않다, 그릇되게 하다’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 그러니 ‘곡학(曲學)’이라 함은 ‘배움을 그릇되게 하다’가 되겠고, 결국 ‘바른 길에서 벗어난 학문’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아세(阿世)’에서 ‘아(阿)’가 좀 생경하려나? ‘언덕 아(阿)’자다. 하지만, 여기서는 ‘언덕’이라는 명사가 아니라 ‘영합하다, 알랑거리다’라는 동사로 쓰인 거다. 즉 ‘세상에 영합하다’가 되시겠다. 학문을 왜곡하여 시류에 영합하거나 권력자에게 아첨하는 행위에 일침을 가하는 말인 거다. 

이 성어의 출전은 사마천 <사기(史記)>의 ‘유림열전(儒林列傳)’이다. 본 편은 전한(前漢) 시대 유학(儒學)의 발전과정과 여러 유학자들에 대한 전기인 셈이다. ‘유림(儒林)’이 ‘공자(孔子)를 숭상하고 유교를 따르는 사람들’이란 뜻이잖나. 한(漢)나라의 무제(武帝)가 유학에 관심이 많아 오경박사(五經博士) 등을 신설해서 유학자들을 우대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유학이 융성하기 시작했지 아마? 

바로 그 한무제(漢武帝) 때, 공손홍(公孫弘)이라는 자가 있었다. 서한(西漢)의 설(薛) 사람으로 집안이 가난하여 돼지몰이꾼으로 살았더란다. 헌데, 글재주는 뛰어났던 거라. 한무제(漢武帝)가 즉위하고서야 등용되었는데, 그때 나이가 몇 살? 무려 60세였다는 거 아닌가. 그 나이에 응시하여 박사(博士)가 되었다지. 이 자의 전기를 읽어보면 정말 파란만장하더라. 그렇게 늦게 정계에 입문한 사람치고 승상까지 올라갔으니 정말 대단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공손홍에 대한 묘사 속에서 그의 사람 됨됨이를 유추해보면 사람들과 언쟁을 피하고 되도록 좋게좋게 해결하고자 하는 성향이 보이더라. 누군가를 시기질투하는 마음이 생겨도 겉으로는 관대한 척, 근데 사이가 한 번 틀어졌다? 티 안내며 은근 복수하는 타입? 이 부분이 좀 쎄(?)한데… 하하. 한 마디로 속을 잘 모르겠는 사람 정도로 이해해도 되려나? 나한텐 그렇게 읽혔다.

반면, 공손홍과는 대척점에 있는 강직한 학자가 있었으니, 투명해도 너무 투명한 그대 이름은 원고생(轅固生). 그는 제(齊)나라 사람으로 시(詩) 연구에 일가견이 있는 인물이었더라. 제나라에서 <시경(詩經)>을 강론하는 자들은 모두 원고생의 견해에 의거했다는 걸 보면 말이다. 

원고생이 한무제가 불러 조정에 나아가니 그때 공손홍도 함께 임용되었다네? 공손홍이 원고생을 어려워했던가 보더라. 왜 그렇잖나. 대꼬챙이 같은 어르신을 보면 왠지 주눅 드는 느낌. 공손홍도 그러지 않았을까. 자꾸 자신의 눈치를 보는 공손홍에게 원고생이 이런 말을 해주었다지. 바른 학문에 힘쓰라고. 올바르지 못한 학설로 세속에 영합하면 안 된다고. 바로 이 말에서 ‘곡학아세(曲學阿世)’가 나온 거다. 어쩌면 그건 사이비(似而非)가 아닌 진짜 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당부였을 지도 모른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며 이 ‘곡학아세(曲學阿世)’라는 성어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누군가에게 밉보일까봐 전전긍긍, 아첨할 거리 찾아 동분서주… 소위 배운 사람들의 그 당당하지 못한 비루함이 참 씁쓸하게 만드는 요즘이다. 할 말 하지 않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언론을 보면 더더욱 한숨만 나오나니. 저이들의 곡학아세(曲學阿世)는 결국 뭘로 이어질까? 혹세무민(惑世誣民)이 아니겠는가.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다’는 바로 그 ‘혹세무민’ 말이다. 

참 힘든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럴수록 듣기 좋고 입맛에 맞는 감언이설과 이성적 판단을 흐리게 하는 궤변에 맞서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으로 서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그러기에 우리는 늘 깨어있어야 한다. 곡학아세, 혹세무민이 만들어내는 회오리 속으로 우리도 같이 빨려들어가지 않으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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