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일차_유비무환有備無患

유난히 준비성이 좋은 친구들이 있다. 어쩌면 저렇게 미리미리 모든 걸 준비해놓을 수 있을까 싶다. 존경심이 절로 차오르게 만드는 사람들, 그들은 중국의 고전 <상서(尙書)>에 나오는 말씀을 미리 공부했음에 틀림없다. 하하. 그럼 우리도 그걸 배우면 그리 되려나? 그래서 오늘 <상서(尙書)>의 그 문장을 우리 눈에도 한 번 담아보려 한다. 올해의 막달이기도 하고, 새해 2024년을 위해서라도 그 뜻을 해석해보며 마음에 새기는 것도 좋으리라. 

그리하야 오늘의 성어가 뭐냐? 바로 유비무환(有備無患) 되시겠다. 원전의 문장을 그대로 한 번 살펴보면서 스스로에게 다짐해보는 시간을 갖자는 의미인 거다. 그럼, 늘 그렇듯 한자풀이부터? 오~케이!!

있을 유(有), 갖출 비(備), 없을 무(無), 근심 환(患)

‘유비(有備)’는 ‘갖춤이 있음’이다. ‘무환(無患)’은 ‘근심이 없음’이고. 그러니까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 함은 ‘갖춤이 있으니 근심이 없다’는 의미요, 좀 더 아포리즘적으로 말하자면 ‘미리 준비가 되어 있으면 우환이 없다’쯤 되겠다. 

이 성어와 관련된 고사는 <좌씨전(左氏傳)>에 나온다. 공자님이 썼다고 전해지는 역사서 <춘추(春秋)>를 노(魯)나라 좌구명(左丘明)이 해석한 바로 그 책 말이다. <좌씨전(左氏传)>의 ‘애공(襄公)十一年(11년)’편에 진(晉)나라의 왕 도공(悼公)이 정(鄭)나라를 정복한 이야기가 나온다. 약소국인 정나라는 항복의 표시로 진나라에 전차며 병기며 악사에 미인들까지 온갖 좋은 것들을 다 바치고 있더라. 전쟁에서 진 것도 서러운데… 힘없는 게 죄지. 

진도공(晉悼公)은 귀한 선물을 받고 기분이 좋아서는 충신 위강(魏絳)과 그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었던가 보다. 그가 바로 이 전쟁의 일등 공신이 아니더냐. 공을 치하하는 왕에게 위강이 한 말이 참 멋지더라는. 

위강의 말을 요약하자면, 왕이 중원(中原)의 맹주가 되심은 다 왕의 능력이라는 거다. 자신이 한 게 무엇이겠냐는 거지. 다만 왕께 바라는 게 하나 있단다. <상서(尙書)>에 이르기를, “거안사위(居安思危)니 사즉유비(思則有備)요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했으니 그 가르침을 새겨들으라는 거다. 그의 이 말인즉슨, ‘편안하게 거함에 위험을 생각하고 생각한 즉 갖춤이 있게 되며 갖추어지면 근심이 없음’이렷다. 이 말을 하고는 선물은 정중히 사양하는 게 아닌가. 나중에 거절하고 또 거절했으나 결국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는 하더만. 참, 위강답도다. 그의 인품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근데, 저기 나오는 <상서(尙書)>는 대체 무슨 책이고? 중국의 태곳적 우(虞), 하(夏), 상(商), 주(周) 시대의 역사책이쥐. 한대(漢代) 이전까지는 그냥 ‘서(書)’라고만 불렸는데, 이후 유가(儒家)의 지위가 높아지면서 ‘소중한 경전’이라는 뜻으루다 <상서(尙書)>라 했단다. 그러다 송대(宋代)에 와서는 <서경(書經)>이라 부르게 되었다지. 현재는 <상서(尙書)>와 <서경(書經)>이 혼용되고 있고. 

중국의 ‘고전’ 하면 늘 나오는 책 있잖나? ‘사서삼경(四書三經)’이라고. 거기서 그 삼경(三經)에 시경(詩經), 역경(易經)과 함께 바로 이 서경(書經)이 포함되지 않나. 참, 역경(易經)이 주역(周易)을 말하는 건 알쥐? 하하. 또 노파심에 설명이 길어졌음. 쏘리~ 

유비무환(有備無患)에 대해 그 출전까지 열심히 설명해가며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란 인간의 준비성은 어떤고? 나를 한 번 돌아본다. 난 얼마나 미래에 대해 준비를 하며 살고 있는지를 봤더니 아주 형편없네. 그렇다. 난 그렇게 철두철미한 계획형 인간이 아니더라. 매달 철저하게 규칙적인 시간을 들여가며 자신의 일을 지키고 있는 이들을 보면 늘 감탄이 나오는 이유이리라. 

자신의 일을 가능한 오래 지속하기 위해 일상을 끊임없이 재조정하는 그들의 여일함이 참 좋더라. 주변의 소란스러움이 전혀 방해가 될 수 없다는 듯 그렇게 의연하게 자신의 삶을 설계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참 좋더라. 

난 한 번도 내게 다가올 시간들을 구체적으로 상상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저 현재가 늘 분주하게 흘러가도록 몸을 내맡기며 열심히만 살고 있는 것도 같고. 한 달, 한 학기, 1년 단위로 끊어서, 그것도 그저 막연히 말이지. 그래서 내 생은 그토록 늘 불안했던 걸까? 근심걱정이 많아서? 그럼 앞으로 열심히 미래를 준비하면 정말 저 <상서(尙書)>의 가르침처럼 근심이 없어질까?

‘나는 오늘이라도 죽을 수 있다’는, 어쩌면 이런 현실적 감각이 1년 너머의 삶을 상상하지 못하게 만든 건 아닐는지. 이런 사람도 노력하면 장기적인 인생 계획을 짜는 일이 가능해질까? 안될 게 뭐 있겠나. 하지만 그 가능성보다 더 중요한 건, 나는 과연 시간을 어떻게 운용하며 사는 사람인지에 대한 진단이지 싶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나의 시간을 살고 싶은지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현재 충실파’인 듯한 나의 고민은 별 수 없이 계속될 것도 같다. 그 현재진행형 고민 속에서 스스로를 찾고 오늘과 다른 내일로 나아가게 된다면 더 바랄 게 뭐가 있겠나. 그거면 되지 않겠나.  그 과정에서 불안과 걱정은 필연적 덤이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