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으면 많을수록 더 좋다’는 뜻의 ‘다다익선(多多益善)’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쥐? 그동안 낯선 사자성어 공부 많이 했으니 이제 익숙한 고사성어로 귀환!!
다다익선(多多益善)은 사마천 <사기(史記)>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에 나오는 말이다. 회음후(淮陰侯)가 누구? 초한지(楚漢志)의 영웅, 한신(韓信)이지 누구겠어. 그렇다. 이 성어는 바로 한(漢)나라 유방(劉邦)과 그를 도와 천하통일을 이룬 한신(韓信)의 이야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자, 그럼 우선 한자풀이부터 하고 두 사람의 대화 속으로 고고~
많을 다(多), 많을 다(多), 더할 익(益), 좋을 선(善)
‘다다(多多)’, ‘많다’는 뜻의 ‘다(多)’가 두 개나 연달아 있으니 얼마나 많겠나. ‘매우 많은’의 뜻이 되시겠다. ‘익선(益善)’은 ‘더 좋다’는 의미겠고. 선(善)이라는 한자는 ‘착하다, 선하다’는 뜻 외에도 ‘좋다’는 뜻이 있으니. 그리하야 ‘많을수록 더 좋다’는 의미 완성!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은 황제가 되면 천하를 다 가졌으니 마냥 좋을 줄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더라. 언제 누가 뒤통수칠까 전전긍긍. 특히 일등 공신 한신(韓信)에 대한 경계를 한시도 늦출 수가 없었다지. 공을 치하하며 그를 초왕(楚王)으로 봉할 땐 언제고… 결국 눈에 가시였던 한신(韓信)을 없는 죄 뒤집어씌워서 회음후(淮陰侯)로 강등시키지 않았던가. 차~암 못났다. 유방~ 권력이란…
아무튼… 그러고 나서 어느 날, 유방과 한신이 무장의 통솔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유방이 한신에게 물었다. ‘나 같은 사람은 군사를 얼마나 거느릴 수 있겠소?’ 그랬더니 한신이 대뜸 ‘폐하가 거느릴 수 있는 군사는 10만밖에 안 되옵니다~’ 하는 거다. 유방이 ‘그럼 넌?’ 하니까, 이 질문에 한신이 한 대답이 바로 ‘다다익선(多多益善)’이렷다. 한신, 너 뭐냐? 지금 유방 앞에서 자기가 더 잘났다고 능력 자랑하는 거? 유방이 안 무서운 겨?
유방의 반응은 어땠을까? 분명 속으로 ‘허허, 요것 봐라?’ 했겠쥐. 유방이 웃으며 그랬단다. ‘많을수록 좋다? 그렇게 잘나신 분이 왜 나한테 붙잡히셨을까?’ 음… 이 말에 기분 나빴을 법도 한데, 우리 한신은 아주 침착하게 요래 답했지.
“폐하께서는 군사를 거느리는 데는 소질이 없으셔도 대신 장수를 잘 통솔하시지 않사옵니까. 이것이 바로 제가 폐하께 붙잡힌 이유이옵니다. 폐하께서는 능력이 타고나셨나이다. 그것은 누가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옵니다.”
오호, 반전!!
역시 한신은 보통내기가 아니었던 것이었다. 유방을 ‘장수의 장수’라 치켜세운 게 아니더냐. 그렇게 한신은 유방과 잘 지내고자 그리 애를 썼건만, 결국 나중에 돌아온 건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니… 그러고 보면 한신의 인생도 참 파란만장하다. 온갖 수모 다 견디며 그 높은 자리까지 올랐는데 말이다.
이래서 ‘쓸모’의 위험에 대한 담론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앞다퉈 ‘쓸모 있음’의 ‘유용(有用)’을 얘기할 때, 누군가는 끊임없이 ‘쓸모없음’의 ‘무용(無用)’을 찬양하지 않았던가. 오늘 한신 얘기를 하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유용이 우리 삶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했는데, 바로 한신이 그에 딱 맞는 사례지 싶은 거다. 씁쓸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쓸모가 있다는 것’, 즉 모두가 그토록 갈망하는 ‘인재’ 뒤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성을 ‘한신의 최후’가 보여주지 않았는가 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선 쓸모의 유무로 가치가 정해지는 것이 너무 당연한데, 이제 관점을 한 번 바꿔보자는 거다. 그것을 아무 의심 없이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는 거다.
정말 이제는 우리도 쓸모가 있어야 잘 산다는 통념이 위태로워지는 이 대목에 집중하고 늘 경계하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래서 누구나 존재 그 자체로 대접받는 그런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각자 그저 나름대로의 이유로 자기 생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지 않나. 그것만으로도 존중받을 이유는 충분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