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일차_정중지와井中之蛙

‘우물 안 개구리’라는 뜻의 사자성어 들어봤나? 정중지와(井中之蛙)? 오호, 조금 생경하지만 반갑군. 그럼 이제 ‘식견이 좁음’을 비유하는 이 ‘정중지와(井中之蛙)’의 한자풀이도 궁금하쥬? 

우물 정(井), 가운데 중(中), 어조사 지(之), 개구리 와(蛙)

‘정중(井中)’이 ‘우물 가운데’, 그러니까 바로 ‘우물 안’이다. ‘지와(之蛙)’는 ‘~의 개구리’겠고. 이렇게 해서 우리에게 그렇게 익숙한 ‘우물 안 개구리’라는 해석이 나온다. 오늘 이 얘기를 하려면 어쩔 수 없이 또 한 번 장자를 소환해야 되겠다. 이 ‘정중지와’가 바로 그가 쓴 <장자(莊子)>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이다.

장주(莊周), 그러니까 장자가 쓴 <장자(莊子)>의 ‘추수편(秋水篇)’에 우물안 개구리를 언급하는 부분이 있다. 다시 말하지만, <장자(莊子)>는 전국시대부터 진나라와 한나라에 이르기까지 300여 년이라는 시간 동안 장자 본인과 그의 제자들, 나아가 장자를 사랑하고 따랐던 사람들의 무수한 사유가 집대성된 책이다. 그중에서 하백(河伯)과 북해약(北海若)의 대화 가운데 다음과 같은 얘기가 나온다.

‘우물 안 개구리에게는 바다에 대해 설명해줄 수 없다. 그것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여름벌레에게는 얼음에 대해 말해줄 수 없다. 그것은 자신이 살고 있는 시간만 고집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분야에만 정통한 사람에게는 도에 대해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자신이 배운 것에만 묶여있기 때문이다(井蛙不可以語於海者,拘於虚也. 夏不可以語於冰者, 篤於時也. 曲士不可以語於道者,束於教也).’

황하(黃河)의 신 하백(河伯)이 물의 흐름을 따라 동쪽으로 가다가 북해(北海)에 이르러 동쪽을 보았더니 물의 끝이 보이지 않더란다. 그제야 하백은 세상의 모든 뛰어난 것을 자기가 모두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자신이 얼마나 오만했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의 탄식을 듣고 북해의 신인 약(若)이 해준 저 말에서 ‘정와(井蛙)’라는 ‘우물 안 개구리’ 표현이 나온 거다. 

난 저 대화도 참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었지만, 그 뒤에 하백의 질문에 대한 북해약의 대답은 정말 다시 한 번 나의 편견을 철저하게 깨주었다. 하백이 뭐라고 물었느냐? 그리고 북해약의 답은?

하백(河伯): “제가 하늘과 땅을 크다고 여기고 털끝을 작다고 여기는 것은 맞는 것인가요?”

약(若): “아니야. 사물의 수량은 끝이 없고, 시간은 멈추어 있지 않으며, 각자에게 주어진 몫은 한결같지 않고, 끝남과 시작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이 때문에 큰 지혜를 가진 사람은 원근의 모든 것을 통찰하고 있기 때문에 작은 것을 깔보지 않고 큰 것을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사물의 수량이 무한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지금과 옛날의 시간이 같음을 분명히 알기 때문에 기나긴 시간이라고 해서 답답해하지 않고, 짧은 순간이라고 해서 조급해하지 않는다. 이는 시간이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득 찼다가 텅 빈다는 이치를 잘 알기 때문에 무언가 얻었다고 해서 기뻐하지 않고 잃었다고 해서 근심하지 않는다. 이는 주어진 몫이 한결같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열림과 막힘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에 살아있다고 해서 기뻐하지 않고 죽는다고 해서 재앙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는 끝나는 것과 시작하는 것이 고정되어 있지 않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을 헤아려 보면 그가 알지 못하는 것보다 적다. 그가 살아있는 시간은 그가 태어나지 않았던 때보다 짧다. 그와 같이 가장 작은 것으로써 가장 큰 공간을 모두 밝혀내려 하기 때문에 혼란에 빠져 스스로 만족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가느다란 털끝’이라는 말이 가장 작은 것을 정의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으며, 또 ‘천지’라는 말이 가장 큰 공간을 표현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from 장자, 김갑수 번역본)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우리가 그 짧은 식견으로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이렇게 우아한 말로써 혼내고 있는데… 우리가 자명하다고 확신하는 것이 꼭 그렇지만은 않고 당연하게 여기는 것 또한 결코 당연한 게 아님을 말하는 게 아니던가. 나중에 프리드리히 니체를 읽었을 때 그가 망치를 들고 기존의 가치를 두드려 부수는 모습에서 데자뷰를 본 것처럼 느낀 건 우연이 아닐 게다. 

오늘은 내가 하고픈 말은 줄이고 장자에 나오는 북해약의 말을 빌어 이 말을 하고 싶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게 다가 아님을 잊지 말자고. 늘 경계하며 겸허한 마음으로 다시 주위를 둘러보는 노력을 멈추지 말자고. 그래야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닌 바다를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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