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일차_형설지공螢雪之功 

형설지공(螢雪之功), 어렸을 때, 한문수업 시간에 배웠던 기억이 난다. 반딧불(螢)과 눈(雪)의 빛에 비추며 책을 읽었다는 거 아닌가? 반딧불이 불빛으로 공부를 했다고? 하얀 눈에 비춰 책을 읽었다고? 진짜? 이러면서 어린 마음에 엄청 감탄하며 해석하지 않았을까나?

이 고사는 중국 진(晉)나라의 기록을 담은 역사서인 <진서(晉書)>에 나온단다. 어려운 환경을 이기고 학업에 정진했던 차윤(車胤)과 손강(孫康)이 바로 주인공이다. 

먼저, 진(晉)나라 차윤(車胤)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등불 켤 기름 구할 돈이 없는 기라. 헌데, 책은 읽고 싶으니 이를 어쩌면 좋노. 어느 여름 날, 수십 마리의 반딧불이 주위를 날아다니는 거라. 밝은 빛을 내면서 말이다. 이거다. 차윤은 그날부터 반딧불이를 주머니에 담아 그 빛으로 밤을 새워 책을 읽었다는 거 아닌가. 그 공이 어디로 갈까? 마침내 이부상서(吏部尙書)가 되었다는 아주 훈훈한 이야기 하나. 

그럼, 두 번째 주인공 손강은 뭘 어찌 했느냐? 어느 날, 손강이 한밤중에 잠에서 깨었는데, 그때 창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한 줄기 빛을 발견했더라. 알고 보니 그것은 하얗게 쌓인 눈더미로부터 오는 빛이었으니. 옳거니! 똑똑한 손강, 이 빛을 이용해서 책을 볼 수 있겠구나. 곧바로 옷을 입고 책을 꺼내들고 집밖으로 나오니, 세상에나~ 넓은 대지에 비친 눈빛이 집 안보다 훨씬 밝은 게 아니더냐. 추위야 물렀거라. 그때부터 눈 내리는 밤이면, 그렇게 밖으로 나와 책을 읽었다는 거 아닌가. 손발이 얼면 몸을 일으켜 뛰며 손가락을 비비며 그렇게 말이다. 하늘도 무심하지 않으셨던가 보다. 그는 결국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나니.

이렇게 훈훈한 두 개의 이야기가 합쳐져서 형설지공(螢雪之功)이 탄생했도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그 악조건을 이겨내고 열심히 공부함을 의미하는 성어로 말이다. 

반딧불이 형(螢), 눈 설(雪), 어조사 지(之), 성공 공(功)

‘형설(螢雪)’은 ‘반딧불과 눈’이요, ‘지공(之功)’은 ‘~의 성공’ 되시겠다. 그러니 ‘반딧불과 눈빛으로 이룬 성공’이라는 뜻이다. 이 사자성어 앞에서 분명 감탄이 절로 나던 그런 시절이 있었으련만… 헌데, 지금은 왜 이리 씁쓸해지는 거지? 그렇게 열심히 책을 읽고 실력을 연마하면 누구나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성공이 아니었을까. 

이제는 더 이상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폐기된 시대라고들 한다. 가난한 가정이나 변변치 못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 열심히 노력해 성공신화를 만들어내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거다. 그만큼 사회적 불평등이 고착화되고 세습되고 있다는 말일 게다. 지금과 같은 불평등 구조 속에서 예전처럼 수직이동은 꿈도 꾸지 못한다는 얘기일 테고. 그렇다면, 이제는 형설지공이 안 통하는 사회라는 말도 되리라. 죽어라 노력해도 안 되는 시대라니… 너무 슬프지 않은가. 

문득 ‘개천’이니 ‘용’이니 하는 메타포에서 왠지 모를 비애가 느껴지는 이유이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것도 안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럼 어쩌라고? 개천도 개천 나름이라고 강변할 수 있을 만큼의 자부심이면 되지 않겠는가. ‘용 되는 게 장땡’이라는 생각만 버리면 되지 싶은데. 남들이 맘대로 정해놓은 기준에 맞춰 내 가치를 정하지 않으면 되지 않겠느냐는 거다. 그게 어디 쉽냐고? 쉽지 않으니 늘 이렇게 괴로운 거 아니겠나.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될 텐데 말이다. 

그랬으면 좋겠다. 사고의 전환, 참 어려운 길일지라도 한 걸음 한 걸음 그렇게 생각을 달리 하는 노력을 해봄이 어떨런지. 형설지공(螢雪之功)이 미덕이 되고 존중되는 그런 사회가 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암튼, 차윤과 손강 같은 건강한 젊은이들의 해피엔딩을 빌어주고 싶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