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일차_대기만성大器晩成

대기만성(大器晩成)은 너무 익숙한 성어다보니 그 출처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저 처음부터 우리 말속에 있는 표현이려니 했던 거다. 그러다 마음이 맞는 선배들과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 강독을 하다가 거기서 딱 만났지 뭔가.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대기만성(大器晩成)이 아니라 대기면성(大器免成)이잖아?

오늘날 우리가 도덕경으로 읽고 있는 판본은 삼국시대 말기에 위(魏)나라의 관리이자 사상가였던 왕필(王弼)이 정리한 것이다. 그래서 보통 왕필본(王弼本)이라고 부른다. 이는 1973년에 중국 장시성(江西省)에서 발견된 백서본(帛书本)과 크게 다르지 않는데, 차이가 나는 몇 부분 중에 이 대기만성이 있으렷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기만성(大器晩成)은 한자가 요렇다. 

클 대(大), 그릇 기(器), 늦을 만(晩), 이룰 성(成)

‘대기(大器)’는 ‘큰 그릇’이요, ‘만성(晩成)’은 저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늦게 이루어진다’이다. 그러니 전체적인 의미는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인 거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들이 조금 늦된다 싶으면 이 성어를 들먹이며 스스로를 위안했더랬다. 큰 그릇이라 시일이 걸리는 거라고. 큰 인물은 늦게야 두각을 드러낸다고. 그러니 괜찮다고 말이다. 그러니 얼마나 고마운 성어인가 말이다.

그렇다면, 백서본(帛书本)에 나오는 ‘대기면성(大器免成)’의 한자구성은 어떤가?

클 대(大), 그릇 기(器), 면할 면(免), 이룰 성(成)

그러면 ‘면성(免成)’이라 함은 ‘이루어짐을 면하다’(??)인가? 그렇다. 글자대로 해석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다’가 될 거다. 철학자 최진석 교수의 노자(老子) 해설서를 보니 역시 ‘완성되지 않다’로 번역하셨더라. 그때 찾아본 중국어 자료에서 언뜻 읽은 것도 같다. 당시 중국어 발음 ‘m’자 음과 ‘w’자 음이 통했기 때문에 ‘면(免:mian)’은 ‘늦은(晩:wan)’으로 읽었고, ‘늦은(wan)’은 ‘면(mian)’으로 풀이했다는 견해도 있다고. 노자(老子) 전공자가 아니라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지금 다시 <도덕경(道德經)>(by 최진석)을 펴서 그 맥락을 살펴보니…

‘밝은 길은 어둑한 듯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길은 물러나는 듯하며, 평평한 길은 울퉁불퉁한 듯하고 가장 훌륭한 덕은 계곡과 같으며 정말 깨끗한 것은 더러운 듯하고 정말 넓은 덕은 부족한 듯하며 건실한 덕은 게으른 듯하고 정말 참된 것은 변질된 듯하다. 정말 큰 사각형에는 모서리가 없고 정말 큰 그릇은 완성되지 않으며 정말 큰 음은 소리가 없고 정말 큰 형상은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 도는 감추어져서 이름이 없지만, 오직 도만이 잘 시작하고 잘 끝낼 수 있다.’ 

그렇다면 노자가 하고자 한 말은 무엇일까? 저 문맥으로부터 이해한 바로는 ‘정말로 큰 그릇은 어떤 특정한 형태로 완성되지 않는다’이리라. 여기서도 우리의 기존 생각을 뒤집는 노자. 우리가 성공이라는 것을 어떤 하나의 프레임으로 만들어놓고 그렇게 되어야만 완성이라고 보는 우리의 생각으로부터 벗어나보라는 가르침이지 싶다.

결국 우리에게 ‘완성’이라는 건 있을 수 없으니 그저 하루하루 자신이 만들어가는 과정에 만족하라는 말일 수도 있겠다. 노자의 가르침은 확실히 사람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뭔가가 있더라. 마치 노자가 내게 말을 건네는 것도 같다. ‘반드시 뭔가를 이뤄야만 한다는 생각은 버려도 되지 않겠느냐’고. 그저 ‘지금 있는 그 도상에서 행복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늦어도 괜찮다고 말하는 ‘대기만성(大器晩成)’으로도 충분히 위로가 되었는데… 대기면성(大器免成)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지 않는가. 하하. 이것이 새로운 배움의 발견이 주는 기쁨이 아닐까 싶다.

문득 며칠 전 ‘해후의 기쁨’을 느꼈던 벅찼던 순간이 떠오른다. 박사 공부하면서 교양중국어를 가르치다 만난 제자 두 녀석을 거의 7년 만에 상봉했더랬다. <샘 찾아 삼만 리> 영화를 찍었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연락이 끊긴 나를 찾느라 두 제자가 보여준 진심에 정말 감동했던 시간. 오랜만에 우리는 함께 마주앉아 회포를 풀었더랬다. 그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더라. 우리 모두. 헤어질 때 한 친구가 했던 말을 잊을 수가 없다.

“샘, 전 지금 큰 그릇이 되어가는 것 같아요. 그동안엔 종지그릇이었는데 인생의 풍파를 넘다보니 조금씩 제 그릇도 커져가는 느낌이에요.”

그렇다. 갓 스무 살 새내기 때 처음 만났던 이 친구의 그 해맑던 얼굴이 어느덧 서른을 넘은 성숙한 여인이 되어 있지 않은가. 시간의 더깨만큼, 견뎌온 인생의 무게만큼 그 친구의 그릇은 정말 많이 커져있더라.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거다. 이 친구처럼 스스로가 그릇이 커지고 있음을 느낀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앞으로도 그 성장은 멈추지 않을 것이므로.

역시 내 제자답게 너무 잘 살아준 친구 손을 꼭 잡아주었다. 우리 친구의 새 이름 하나 지어주고 싶어졌다. 정말이다. 내 이름 ‘지오(至吾)’처럼, 친구의 그 마지막 말을 담은 이름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큰 그릇이 되어가는 것 같아요!’ 음… 클 대(大)는 너무 강하니까 그럼 ‘다완(多碗)’?? 하하. 

3 thoughts on “52일차_대기만성大器晩成”

  1. 대기면성이라는 말고 대기 만사성이라는말이 이렇게 마음을 푸근하게 하네요. 요 며칠 살짝 방학 시기라서 잠을 자는건지 마는건지 하면서 일을 해, 또 다시 심장에 무리가 오는 저에게 .. 가마솥 아궁이의 따뜻함처럼 따뜻하게.. 뭔가 일러주시는 말씀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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