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접지몽(胡蝶之夢)?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이라는 말로 한 번쯤은 들어봤으리라. 보통은 그리 회자되니 말이다. 한동안 인문학 열풍이 불면서 사람들이 많이 좋아하는 인물로 떠오른 이름 중 하나가 장자(莊子)일 듯도 한데. 노자(老子)와 함께 도가(道家)를 형성한 장자, 그래서 우리는 흔히 노장사상(老莊思想)이라는 말로 철학적 의미에서의 도가사상(道家思想)을 얘기하지 않나.
오늘의 성어, 호접지몽(胡蝶之夢)은 장자가 봄날에 꿈속에서 나비가 되어 즐겁게 놀았다고 해서 ‘호접춘몽(胡蝶春夢)’이라고도 부른다. 뭔가 일장춘몽(一場春夢)이 떠오르지 않나? 모든 좋은 것들, 부귀영화가 꿈처럼 덧없이 사라지는 것을 비유하는 성어 말이다. 우리에겐 너무 익숙한 인생무상(人生無常)의 다른 이름. ‘한바탕의 꿈’이라고도 하고. 그래서 부질없고 쓸모없는 일이나 생각 등을 가리킬 때 자주 등장하는 성어가 일장춘몽이다.
그렇다면 호접지몽도 그저 인생의 덧없음을 얘기한 거냐? 물론 그런 해석도 가능하지만, 나에게 호접지몽(胡蝶之夢)은 결이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오늘 바로 그 얘기를 해보려 한다. 일단 늘 그렇듯 호접지몽(胡蝶之夢)의 한자구성부터!!
오랑캐 호(胡), 나비 접(蝶), 어조사 지(之), 꿈 몽(夢)
‘호접(胡蝶)’은 ‘나비’의 한자어다. 오랑캐 ‘호(胡)’를 썼구나. 새삼 이 한자를 자세히 들여다보게 된다는. ‘지몽(之夢)’은 ‘~의 꿈’이니 한 마디로 ‘나비의 꿈’이렷다. 나비의 꿈이 뭐 어쨌다고?
이 성어는 사실 참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장자(莊子)>의 ‘제물론( 齊物論)’편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장자가 하는 말인데, 대~충 요약하면 이렇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더라. 훨훨 나는 게 분명 나비 맞네. 기분 좋게 마음껏 하늘을 날아다니면서도 스스로 장주인 줄을 알지 못했더라. 꿈에서 깨어 보니 (어머나?) 틀림없는 장주 자신인 거라.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이냐,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이냐. 대체 이건 뭐냐?”
저기 나오는 장주는 누규? 장자의 본명이 장주(莊周)다. 나비가 된 장주인지, 장주가 된 나비인지… 장자는 이 호접몽을 통해 대체 뭘 말하려고 했을까? 사물과 하나 된 듯한 그런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 그래서 그게 뭐냐고요? 장자 철학의 저변을 관통하는 핵심은 ‘세상은 변한다’일 게다. 저 나비 얘기 다음에 이어지는 문장에서 나오는 ‘물화(物化)’를 이 맥락에서 읽어야 하지 않을까?
장자가 나비고 나비가 장자일 수 있는 세계, 그렇게 모든 것이 혼재되어 서로 융합하고 상호 의존하며 그 안에서 끊임없이 변화되는 것이 ‘물화’인 거다. 마치 장자가 우리에게 반문하는 것 같지 않은가? 만물의 변화 앞에서 인간이 인위적으로 구분 지으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장자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이럴 땐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을 상기하자. 저자가 독자에게 준 ‘빈틈’을 내가 해석하는 수밖에. 그런 의미에서 난 호접지몽을 한바탕의 꿈같은 덧없음으로 읽기보다는 ‘니체’적으로 사유하겠다. 하나의 고정된 진리는 없으니 이 세계는 장자의 눈으로도, 나비의 눈으로도 바라볼 수 있음을 말하는 거라고. 이것을 좀더 발전시키면 충분히 니체의 ‘관점주의’로도 읽을 수 있을 것 같고. 아니면 말고~ 하하.
장자의 행간에서 찾은 호접지몽의 독법은 이렇다치고. 갑자기 드는 엉뚱한 생각 하나. 21세기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호접몽의 혼란을 그야말로 제대로 경험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메타버스, 가상현실 등의 단어가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세상에서 살다보니 가상공간과 실제 공간 그 사이 어딘가에 우리가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때가 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 하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실존을 걱정해야 할 것만 같은 그런.
아무튼…
나는 정말 장자가 좋다. 힘들고 비루한 자신의 삶에 이입되어 울거나 슬퍼하기보다는 거기로부터 거리를 두고 웃음으로 승화시킨 장자의 그 쿨함이 좋다. 가진 건 쥐뿔도 없으면서 자존심 안 굽히고 자기 자신으로 오롯이 살았던 지식인, 난 그래서 그가 좋았던 거다. 나랑 닮은 것 같아서? 음… 가진 거 없고 자존심만 쎈 부분은 확실히 나랑 비슷한데… 자기 삶의 주체로 산 건? 글쎄… 나한텐 없는 것 같아 일단 반성.
고통 앞에서 웃을 수 있다는 건 그 고통에 매몰되고 짓눌리지 않고 그걸 자신이 적극적으로 끌어안았다는 의미다. 아무런 장애 없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어서 자유가 아니라, 자신을 가로막는 그 무언가를 넘어섰기에 자유롭다고 하는 거다(니체의 ‘초인’처럼?). 그것이 장자가 말하는 자유일 게다. <장자(莊子)>의 ‘내편 소요유(內篇 逍遙遊)’에 나오는 상상의 새 대붕(大鵬)이 그 악조건을 이기고 큰 날개짓하며 날아오를 때의 자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가 아닐는지.
오늘밤은 왠지 니체와 장자를 나란히 놓고 다시 읽어보고 싶은 밤이다.
장자가 어떤 분인지 조금 구체적으로 알고싶네요. 어떤 인물과 어떤 생을 사셨는지.. 궁금합니다.
궁금하시지요? ㅎㅎ 개봉 박두~ 두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