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일차_시비지심是非之心 

만약 우물에 빠진 아이를 본다면? 이 상황에서 누구나 자연스럽게 생기는 마음이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맹자님이 그리 말씀하시었다. 바로 그 측은지심이 ‘인(仁)’의 단서(端)가 된다고도 했고. 이로부터 맹자의 인간 본성에 관한 그 유명한 ‘성선설(性善說)’이 나왔으리라.

나는 정말 굳게 믿었었다. ‘인간은 본래 선하다’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인 ‘불인지심(不忍人之心)’이 있다고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에게 잘못하는 그 어떤 경우라도 일단은 그가 혹은 그녀가 처한 환경 때문이겠거니. 그렇게 상황을 탓하면 탓했지 인간 자체는 미워하지 않으려 노력했었다. 

그뿐인가.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인 수오지심(羞惡之心)도, 사양하는 마음인 사양지심(辭讓之心)도 반드시 우리 안에 있다고 믿었다.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의로움(義)’의 단서요, 사양하는 마음은 ‘예(禮)’의 단서라고 하지 않던가. 맹자님의 말씀대로라면 인간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이 덕목들은 분명 우리 안에 있어야 했다. 그렇게 사람은 이 네 가지 단서인 사단(四端)을 가지고 있음을 찰떡같이 믿었더랬다. 가만, 세 갠데? 사단이라며? 

그렇다. 사단 중에 마지막 남은 그 한 개가 바로 오늘의 성어, 시비지심((是非之心)이렷다. 이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은 ‘지(智)’의 단서라 했다. 그러고 보니 이제야 완성이 되었도다. 유교 윤리의 중심이 되는 네 가지 덕목인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말이다.

그럼 이제 시비지심(是非之心)의 한자구성을 볼 차례다.

옳을 시(是), 아닐 비(非), 어조사 지(之), 마음 심(心)

‘시비(是非)’는 ‘옳고 그름’이요, 바로 그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이 시비지심(是非之心)인 거다. 맹자님 왈…

無是非之心 非人也(무시비지심 비인야) 시비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是非之心 智之端也(시비지심 지지단야) 시비지심은 지혜의 시작이라.

이 ‘시비지심(是非之心)’은 또 다른 결의 가르침이었다. 도덕적 판단의 문제와 연결되는 ‘시비지심’은 참 다양한 관점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게다.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Justice)’라는 강의에서처럼 말이다. 말이 나왔으니 ‘시비지심’을 ‘정의’와 연결해서 얘기해봐도 좋으리라. 과연 어떤 행동이, 어떤 판단이 옳은 행동이고 옳은 판단일까? 

샌델 교수는 소수를 위해 다수가 희생하는 것에 대해 묻는다. 또 다수를 위해 소수가 희생하는 것에 대해 윤리학의 관점에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느냐고. 그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이런 질문과 만나게 된다. ‘윤리적이라는 것’, ‘도덕적이라는 것’에 대한 판단이 과연 가능한가? 그것은 결국 ‘누구의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음’으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마이클 샌델 교수가 말하고자 하는 ‘정의’는 과연 무엇일까. 공동체주의자답게 그는 개인은 결코 ‘고립된 주체’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의 워딩을 따르자면, 현실의 인간은 다양한 연고, 즉 문맥과 상황이 있는 ‘연고적 자아’인 거다. 우리는 다양한 사회적 관계로 얽힌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의’의 문제는 ‘관계’라고도 부르는 그 ‘맥락’을 떠나서는 풀어낼 수 없겠네?

맞다. 그래서 정의를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Common Good)을 고민하는 것이라 하지 않나. 그렇게 공감대를 이끌어낼 때 우리는 행복한 삶이 가능한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고. 

그러면 공동체 안에서 공동선을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샌델 교수는 말한다. 때때로 사람들의 희생이 필요하다고. 그리고 그 희생은 다시 그 사람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해줄 거란다. 이것이 우리 사회가 진정 필요로 하는 덕(德)이 아니겠느냐고. 와… 신기. 다시 맹자의 가르침으로의 회귀인가? 결국 돌고 돌아 ‘인간의 본성이라던 네 가지 덕성’, 인(仁)·의(義)·예(禮)·지(智)의 사덕(四德)으로 돌아온 거냐고.

그렇다면? 이제 어쩔 수 없겠다. 혹자는 참 고루하다 뭐라 하겠지만, 난 계속 이 덕(德)의 힘을 믿어볼란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믿어오지 않았던가. 맹자의 이 가르침으로부터 나는 사람 된 도리는 어찌해야 하는지 삶의 태도를 배웠으니까. 그리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정의(正義)가 정확하게 뭔지는 모르나 최소한 나 자신에게 부끄럽게 살지는 않으리라고. 

계속 그렇게 살면 되지 않을까?

2 thoughts on “49일차_시비지심是非之心 ”

  1. 시비지심..또 이 무식한 귓때기는 “ 시비건다” 라고 이상하게 들리지만..그런데 진짜 뜻도 저한테는 시비처럼 오는 이유는ㅋㅋㅋㅋ 전 요즘 공동의 선을 이끌어내는 노력보다 각자의 다름을 어떤 힘으로 공존할까가 더 관심이 가는듯해요. 뭔가 옳고 그름을 나누는것, 그것을 통해서 공동의 선을 창출한다는것도 어찌보면 목소릴를 낼수있는 사람들읙 것이 아닐까.. 오늘도 이렇게 귀한 지식을 알려주셔서 너무 감사.. 시비지심..이건 꼭 기억할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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