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고요한 시간이다. 밖에는 비가 오나보다. 빗소리가 간간이 들리는 것도 같다.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까만 밤이다. 어느새 가을밤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이 조용한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감미로운 피아노곡… 차분한 이 밤에 정말 잘 어울린다. 가끔씩은 ‘골똘함의 시간’이라는 장치 없이, 도움 없이 그냥 이렇게 멍하니 흘러가는 대로 나를 맡기는 것도 현명한 방법일 수 있겠다. 그렇게 가을밤이 흐른다.
“조용한 사람의 내면이 가장 소란스럽다.” 스티븐 호킹이 했던 말이다. 이 한 문장이 내 눈에 담기던 순간이 떠오른다. 참 아이러니라 생각했었다. 사실 내 안에선 늘 부산스럽고 바빴는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어쩌면 대책 없이 침잠하고 있는 것처럼만 보이던 내 속의 진짜 모습이었을지도. 이런 생각으로 저 짧은 글귀에 격하게 공감했던 기억. 답을 얻은 느낌이었달까?
그때 난 내면만이 아닌 내 삶 전체가 조금은 소란스러웠으면 좋겠고, 조금만 더 분주해졌으면 좋겠고, 활기도 조금 얹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그래서 지금은? 그 소원이 이루어진 모양이다. 요새 난 많이 바쁘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그렇게 바쁘게 달리던 내 삶에 잠시 쉼표를 찍고 싶은 시간이 찾아왔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들 한다. 정말 그런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말에 딱 맞는 사자성어를 가져와봤다. 바로 중국 당(唐)나라의 한유(韓愈)가 아들에게 쓴 편지의 한 구절 속에 앉아있던 ‘등화가친(燈火可親)’이다.
한유((韓愈)는 당(唐)대의 대문호이자 사상가이고 정치가였다. 그가 살던 시대는 형식적이고 수사적 문체인 ‘변문(騈文)’이 유행하던 때였다. 그게 맘에 안 들었던가 보다. 그는 옛 성현들이 썼던 고문(古文)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더라. 화려하지 않고 소박하되 자유로우며 성인의 도를 담은 고문(古文)을 써야 한다고 말이다. 음… 고문(古文), 넘나 어렵지. 현대인들에게 고문 해석은 정말 고문(??)이다. 하하.
어느 가을 날, 한유가 아들 창(昶)에게 하고픈 말을 담아 편지를 썼단다. 자식 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더니, 그는 이렇게 멋진 아버지이기도 했구나. 그가 썼던 <부독서성남시(符讀書城南詩)>라는 편지글에서 오늘의 성어, ‘등화가친(燈火可親)’이 나온다. 우선 이 네 글자의 한자풀이부터 해보면 요렇다.
등잔 등(燈), 불 화(火), 가할 가(可), 친할 친(親)
‘등화(燈火)’는 그야말로 ‘등불’이렷다. ‘가친(可親)’은 ‘친할 수 있다’, 즉 ‘가까이 한다’는 뜻이겠다. 그러니까 ‘등불을 가까이 하다’가 함의하는 바로 ‘독서하다’인 거다. 실제로 한유가 ‘날도 서늘해진 가을밤은 등불 아래서 책 읽기에 좋은 시절’이라며 아들에게 독서를 권하고 있나니.
그 구절의 원문 감상 타임~^^
時秋積雨霽(시추적우제) 때는 가을, 장마가 그치고 나니
新凉入郊墟(신량입교허) 서늘한 기운이 산들에 그득하구나
燈火稍可親(등화초가친) 이제 등불도 가까이 할 만해졌으니
簡編可舒卷(간편가서권) 책을 펼쳐봄도 가하리라.
부모 된 마음은 다 이 좋은 계절에 우리 아이가 책을 좀 읽었으면 할 테다. 한유는 그 바람을 담아 저리도 다정한 편지를 써서 아들 창(昶)에게 보냈더라. 어쩌면… 창(昶)이는 아버지의 편지를 읽자마자 자세를 고쳐 앉고 책을 펼쳤으리라. 내 아빠의 편지를 받았다면 나 역시도 그러지 않았을까?
한유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도 같다. 아이들에게 ‘이거 해라, 저거 해라’하며 잔소리꾼이 되지 말고 품격 있는 부모가 되어보라고 말이다. 꼭 뭔가를 권하는 편지가 아닐지라도 엄마가, 또는 아빠가 그저 마음을 담아 자식에게 쓰는 편지 한 장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활자 위에서 유영하던 부모의 진심이 자식의 가슴에 살포시 내려앉는 그 순간은 또 얼마나 다정한가.
상상만으로도 온 방안에 퍼지는 따스함으로 이 가을밤이 물들고 있다. 오랜만에 아들에게 편지 한 번 써볼까나. 그것도 좋으리라.
아들덕분에 등화가친할 수 있는 삶을 만나네요
이 가을이 가기 전에 더 많이 등화가친의 일상을 살아야겠어요. ㅎ
너무멋진 말이네요..등화 가찬..들려지는 소리도 쏘–옥 맘에 듭니다. 조용한 사람의 내면이 가장 소란스럽다는 말에 제 눈길도 갑니다. 전 거꾸로 내 내면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하면 저는 말수가 적어지는것 같습니다. 먹는것도 덜 먹고.. 내면이 소란스러워져야겠어요..
샘~ 등화가친… 이 발음 느낌 마음에 쏘~옥? ㅎㅎ 저도 스티븐 호킹의 말이 너무 인상적이었어요. 지금도 늘 떠올리지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