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걷는다. 갈래갈래 난 길들을 왔다 갔다 세심하게 다 걸어주고(혹시라도 빠뜨리면 삐질세라 ㅋ) 유난히 인적 드문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커다란 떡갈나무들이 곳곳에 서 있는 게 참 운치가 있다. 이 가을에 딱 어울리는 공간, 아름드리 떡갈나무 아래 동그마니 놓여있는 파란 의자 하나. 나를 기다렸으나. 다가가 앉는다. 최고의 뷰다. 누군가 이곳에서 한참을 앉아서 이렇게 가을을 만끽했겠구나. 나는 그이의 뒤를 이어 애초부터 내 의자인양 그 자리를 지킨다. 가을이 보여줄 수 있는 정취 가운데 최상급, 그야말로 화룡점정(畵龍點睛)이렷다.
화룡정점(畵龍點睛), ‘용의 눈동자를 그린다’는 뜻으로 가장 중요한 부분을 해냄으로써 마침내 일을 끝냄을 이르는 말이다. 무심하게 이 성어의 빤한 뜻을 소환하다가 느닷없이 밀려드는 상념들로 다시 생각이 멀리 갔다. 그럼 그 ‘중요한’의 가치는 어디서 오는 건데? 이 조금은 도발적인 질문이 불쑥 고개를 쳐든 것이다.
우리들 각자는 어딘가에서 어떤 형태로든 각자의 역할을 갖고 살아간다. 거기에는 ‘중요하고 안 중요하고’의 가치 판단이 들어가선 안 되는 게 아닌가? 이런 얘기가 하고 싶었던가 보다.
먼저 숙제부터 해야쥐? 그럼 일단 화룡점정(畵龍點睛)의 시공간적 배경을 찾아 중국의 고대 양(梁)나라로 날아가 보자. ‘듣보잡’이라고? 하하. 그럴 지도. 바로 그 양(梁)나라는 중국 남북조 시대에 한족이 강남에 건국한 남조(南朝)의 3번째 왕조이다. 이 작은 나라의 장승요(張僧繇)라는 화가와 관련된 고사에서 화룡점정(畵龍點睛)이 나왔다.
양나라 초대 황제인 양무제(梁武帝)의 명을 받들어 장승요가 금릉(金陵:南京)에 있는 안락사(安樂寺) 벽에 용 네 마리를 그렸단다. 사흘 만에 그의 손끝에서 뚝딱 태어난 용의 위풍당당함은 마치 진짜 용이 살아난 듯했다고. 구경꾼들이 감탄하며 다가가 벽화를 들여다보니, 어라? 용들이 다 눈이 없네? 하여 그 까닭을 물으니, 장화백은 ‘눈을 그리면 용들이 날아갈 텐데?’ 했단다. 설~마? 하며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장화백이 용 두 마리의 눈 속에 검은 점을 찍었더라.
그러자, 오모나…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더니 두 마리 용이 벽을 부수고 하늘로 날아올라 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게 아닌가. 잠시 후, 구름이 걷히고 하늘이 개었을 때는 새하얀 벽에는 용 두 마리만 덩그러니 남아있더라는. 아연실색한 구경꾼들 옆에 웃고 있는 장승요? 그림이 그려지는가? 하하.
그림 화(畵), 용 룡(龍), 점찍을 점(點), 눈동자 정(睛)
‘화룡(畵龍)’은 ‘용을 그리다’이고, ‘점정(點睛)’은 ‘눈동자를 점찍음’이다. 우리 일상에서 정말 많이 쓰는 사자성어다. 전체 해석은 ‘용을 그리고 눈동자를 그려 넣다’가 되시겠다. 이 말인즉슨 가장 중요한 부분까지 마무리되어야 일이 끝남을 이르는 말이다. 무슨 일을 함에 있어 최후의 마무리로 인해 일이 비로소 완성되고 그와 동시에 그 일 자체가 훨씬 돋보이게 됨을 비유한 말이라 하겠다.
‘화룡점정’은 그렇게 우리 일상에서 ‘마무리로서의 완성’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러니까 ‘화룡점정을 찍다’는 말은 뭔가 가장 중요한 부분이 채워짐으로써 드디어 완성되었다는 느낌인거다. 하이라이트랄까?
이쯤에서 며칠 전 예술의 전당에서 있었던 연주회, ‘가을을 물들이다’에서 느꼈던 감회를 공유해야겠다. 그날 우리의 좌석은 2층 R석이었다. 시작 전에는 좌석이 1층 무대 맨 앞이 아니어서 아쉬웠던 마음이 오케스트라 연주가 끝나고 난 뒤에는 ‘이 자리여서 너무 좋았다’로 바뀌었다는. 왜?
1층 객석에서 무대를 정면으로 마주할 때는 볼 수 없었던 풍경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2층에서 아래를 조감한 덕분에 무대의 맨 마지막 줄에서 혼신의 열연을 펼치던 팀파니 연주자가 내 두 눈에 담겼다는 얘기다. 평소 오케스트라 연주에서 팀파니가 그렇게 감동을 준 적이 있었던가. 하긴 팀파니는 오케스트라 템포를 좌우하는 역할이니 만큼 늘 높은 집중력을 요하는 역할이었다. 내가 주목을 하지 않았을 뿐.
월튼 교향곡 1번, 이 곡에서는 팀파니가 거의 주인공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 연주자의 퍼포먼스는 인상적이었다. 마치 춤을 추듯 강약을 조절하며 스틱을 움직이던 그 자태라니~ 특히 마지막 4악장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그때까지 옆에서 자리만 지키던 또 한 명의 팀파니 연주자까지 가세하면서 교향곡은 하이라이트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내 가슴까지 웅장해지던 바로 그 순간, 한 쪽에 다소곳이 앉아만 있던 두 여인마저 자리에서 홀연히 일어났다.
그중 한 명이 양 손으로 심벌즈를 잡고 서로 부딪힌다. 그 동작의 육중함과 부드러움이라니. 그리고 연주내내 맨 왼쪽에 박제된 것 같았던 또 한 명의 여인이 살아나더니 앞에 놓여있던 공말렛을 잡고는 옆에 세워진 대형 타악기 공(Gong)을 치는 거다. 아, 그 소리의 조화로움이라니. 그 단 몇 번의 울림을 위해 그녀는 그토록 오랜 기다림 속에 거해야 했으리. 그마저도 오케스트라의 일부라고 느껴지면서 내 안에서는 뭔가가 차올랐다. 그것은 ‘감동’이라고 불릴 테다.
그렇게 이 오케스트라의 숨은 영웅들은 마지막에 그 존재감을 발산하며 아주 멋지게 화룡점정을 찍었다. 아주 조용하게, 하지만 가장 강렬하게 말이다. 그 여운이 정말 오래가더라. 연주가 다 끝나고 친구랑 한참을 얘기했던 것 같다. 평소 주목받지 못하는 이들의 숨은 공로와 그 숭고함에 대해서.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드는 거다.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다 주인공이고 각각이 다 하이라이트이며 그 전체의 합이 화룡점정을 찍는 거라는. 그러기에 그날은 이렇게 기억되지 싶다.
이전엔 느껴보지 못했던 또 다른 감동에 흠뻑 물들었던 가을밤이었노라고.
이 시간을 선물해준 친구야, 고맙다.
용의 마지막 눈동자를 그리다.. 느낌이 다가옵니다. 아무리 멋드러지게 용을 그려도 용의 눈동자를 맹구로 그리면 용은 용이 아니겟다는 생각을 합니다. 가끔씩 일을 하다가 여러사람이 계속 한자리를 맴돌고있을때, 지나가듯이 누군가가 탁 던지 한마디가 이런 화룡정점을 찍는경우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화룡 정점이 될때가 있지않을까.. 그래서 더욱 소중한거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너무 아름다운 가을을 담아주셔서 감사..
무심하게 던지는 한 마디가 화룡점정이 되는 경우… 참 많지요. ㅎ 재미난 에피소드가 양산될 수 있는 성어 중 하나. 가을이 너무 이뻐요~ 샘^^
미술시간에 수묵화 그리던 순간이 생각납니다. 마지막에 파안을 그리는 순간이 있어요. 물고기 눈이라고 하더군요. 가을이 만땅 익었네요
와.. 수묵화라니… 넘 품격있는 은애샘의 모습 상상 중~ ㅎ 가을이 정말 깊어갑니다. 그속에서 우리 행복합시다~
‘오늘도 나는 내 삶의 화룡점정이었다’로 마감합니다.~
오늘은 어떤 화룡정점을 찍으셨을까 궁금해지네요~ 샘의 오늘^^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