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일차_수주대토守株待兎

수주대토(守株待兎), ‘나무 그루터기에서 토끼를 기다리다’는 뜻이다. 이 성어는 다양한 상황에서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겠다. 우선, 운에만 의지한 채 노력은 하지 않는, 뭔가를 쉽게 얻으려는 사람을 풍자할 때도 쓸 수 있다. 한 가지 일에만 얽매여 더 발전하려 하지 않는 융통성 없는 사람에게도 가능하다. 즉 옛날 방식만을 고집하는 사람을 꼬집을 때도 매우 유용하단 얘기다. 

그러니까 ‘수주대토(守株待兎)’는 어떤 착각에 빠져 되지 않을 일을 고집하는 어리석음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라 하겠다. 이는 우리가 일상을 살아감에 있어 유혹되기 쉬운 허황된 믿음을 버리고 현실에 발을 붙이고 노력해야 함을 이르는 말인 거다. 

그렇다면, 이제 이렇게 뼈때리는(?) 의미를 가진 수주대토(守株待兎)의 한자를 알아볼까나.

지킬 수(守),  그루 주(株), 기다릴 대(待),  토끼 토(兎)

‘수주(守株)’는 ‘그루터기를 지키다’이고, ‘대토(待兎)’는 ‘토끼를 기다림’이다. 전체를 해석하자면 ‘나무 그루터기를 지키며 토끼를 기다리다’가 되겠다. 이게 대체 무슨 뜻이지? 중국의 고사 속으로 들어갈 시간이로다. 우선 <한비자(韩非子)>의 <오두(五蠹)>편이라는 출전이 눈에 들어온다. 중국 전국(戰國)시대 말기 한(韓)나라의 공자(公子)였던 한비(韓非)라는 사람(보통은 ‘한비자’라 불리지)이 쓴 책이렷다. 한비자는 법가(法家) 이론의 집대성자로도 유명하지 않나. 법가(法家)가 무엇이관대? 음… 또 설명할 게 많아지는군. 

제자백가(諸子百家)는 들어봤나? 그거야 알쥐. 중국 역사에서 춘추전국시대의 여러 사상가와 그 학파를 말하잖나. 그 수많은 학파들이 서로 사상을 자유로이 논쟁하던 것을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 하고 말이지. 맞다. 바로 그 제자백가 중의 주요 유파 넷만 꼽으라면 공자(孔子)의 유가(儒家), 노자(老子)의 도가(道家), 한비자(韩非子)의 법가(法家), 그리고 묵자(墨子)의 묵가(墨家) 되시겠다. 참, 묵자는 겸애설(兼愛說)을 주장한 바로 그 사람이렷다. 겸애란 뭐냐? 조건 없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서로 이롭게 함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묵자는 평등박애주의자였다’ 이 말씀.

다시 한비자(韩非子)로!! 그 당시 법치주의를 설파하던 법가는 ‘인(仁)’을 내세우며 왕도정치를 주장하던 유가와 대척점에 있었다. 한비자의 공자 비판에서 자주 보이던 것이 ‘우화 활용법’이었으니. 바로 수주대토도 그런 맥락에서 나왔던 거다. 

춘추시대의 송(宋)나라에 해만 뜨면 밭에 나가 열심히 일하는 아주 부지런한 농부가 있었다. 어느 날, 농부는 여느 때처럼 밭에서 일하느라 고부라졌는데, 난데없이 토끼 한 마리가 달려오더니 커다란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치는 게 아닌가. ‘이게 머선일이고?’ 농부가 다가가보니 토끼는 이미 죽어있더라는.

생각지도 않게 토끼를 얻었으니 농부는 재수 좋은 날이라며 기뻐했겠지? 그날부터 농사일을 팽개치고는 본격적으로 그루터기 지키기에 나선 농부. 이상히 여긴 동네 사람들이 먼 일이냐고 물으니. 농부 대답이 가관이렷다. 

“며칠 전, 이 나무 그루터기에 토끼가 부딪쳐 죽지 않았겠소. 지금 나는 토끼가 또다시 나타나서 내 앞에서 죽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오.”

과연 기적이 또 한 번 일어났을까? 그럴 리가. 물론 농부는 동네에서 웃음거리만 되었지. 그뿐인가. 허구한 날 그루터기만 지키고 있었으니, 그의 밭은 어찌 됐겠나? 손길이 닿지 않은 밭에는 잡초만 무성해져서 그나마 농사까지도 다 망쳐버렸다는 슬픈 전설이… 

한비자가 이 고사를 통해 하고자 한 말은 뭔가? 바로 공자의 생각이 시대에 뒤떨어졌음을 꼬집은 것일 테다. 한비자의 눈에는 공자가 꼭 그루터기 옆에서 토끼를 기다리는 농부처럼 보였던가 보다. 그 옛날 옛적 요순(堯舜)시대를 이상적인 정치로 꼽으며 그것을 재현하고자 했으니 말이다. 새로운 시대 흐름을 따르지 않고 예전의 낡은 관습만을 고수한다고 본 것이겠지. 그 옛날 훌륭했다고 지금도 그러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냐고 반문하고 싶었던 게지. 

‘요순(堯舜)’이라 함은 중국의 건국신화에 나오는 두 군주로서 성군(聖君)의 대명사가 아니던가. 그러니 그들이 다스렸던 ‘요순시대’는 당연히 ‘태평성대’의 다른 이름이겠고. 문득 요임금과 순임금을 떠올려보니 그들이 다스렸던 ‘되돌아갈 수 없는 너무 좋았던 옛 시절’이 궁금하긴 하다. 역사상 가장 성공한 리더임에 틀림없는 요순의 백성으로 사는 기분은 또 어떨지. 

덕(德)으로 천하를 다스리던 태평한 시대, 치세(治世)의 모범으로 늘 회자되는 그 요순시절은 지금 이 시대에는 진정 불가능한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의 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또 하나의 비극이 중동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다. 무고한 생명들이 또다시 무참히 짓밟히고 있다. 저이들은 왜 단 한 번의 ‘평화’도 가져보지 못한 채 저리도 허무하게 스러져야만 할까. 참 가슴아픈 일이다. ㅠㅠ

요임금과 순임금이 되살아나서 저 크림반도와 중동지역도 태평성대로 만들어줬으면 싶다. 온화한 바람처럼 길 가는 모든 이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던 그 요순시절이 저곳에서 재현되었으면 싶다. 매일 절망적으로 업데이트되는 뉴스기사를 읽다가 내 맘 속에 자리한 이 헛망을 들여다보노라니… 

나무 그루터기 곁에서 토끼를 기다리던 이의 마음도 이랬으려나?    

2 thoughts on “36일차_수주대토守株待兎”

    • 율리닷~^^ 여기서 만나니 이리 반가울 수가… 읽어주고 공감해주고. 율리 최고~
      우리 절반도 안 왔으니… 올해 아직도 할 게 많이 남았음. 그지? ㅎㅎ 남은 시간들도 홧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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