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차_격물치지格物致知

‘격물치지(格物致知)’라고라? 아, 딱 봐도 어렵다? 아니. 어렵지 않소이다. 그냥 따라와보시라.

이 말은 중국의 고전으로 꼽히는 <대학(大學)>에 나오는 8개 조목(八條目) 중 앞의 2개를 합쳐 놓은 것이다. 가만, 그 8조목(八條目)이 뭐였더라?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 캬~~ 지금도 기억이 이리 또렷할 수가.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한 번쯤은 들을 봤을 테니, 이 을매나 쉽소.

오늘은 ‘격물치지(格物致知)’라는 뜻도 좋지만, 그 말이 나온 책과 관련해서 중국의 고전 중심으로 얘기를 해야 할 듯하다. 이 <고사성어 에세이 100>(미리 김칫국? 하하)을 다 완성하고 나면 그래도 중국의 가장 유명한 유교 경전 이름이라도 기억할 수 있게 말이다. 겉핥기식이라도 좋으니 우리 일상에 자주 거론되는 사서오경(四書五經) 정도는 알았으면 해서다. 자, 그럼 시작해볼까나. 재미없어도 끝까지 읽어주실 거쥬?

중국의 고전 중에 <예기(禮記)>라는 유교 경전이 있다. 문자 그대로 ‘예(禮)에 관한 모든 기록(記)’으로서 예법 관련 이론과 실제를 망라해 총 49편으로 구성한 오경(五經)의 하나다. 특기할 것은 비단 의례(儀禮)에 대한 해설뿐 아니라 음악과 정치, 그리고 학문 등의 전반적인 영역에서 예의 근본정신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49편중에서 제31편 ‘중용’과 제42편 ‘대학’의 내용만 따로 주석을 단 게 바로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이다. 이 두 권의 책은 <논어(論語)>, <맹자(孟子)>와 함께 사서(四書)의 반열에 올라있지 않은가.

정리하자면, 원래는 <예기(禮記)>의 제42편이었던 <대학>이ᅠ송(宋)나라 때ᅠ성리학(주자학)이 확립되는 과정에서ᅠ남송(南宋)의 유학자 주희(朱熹)가 내용의 편차를 수정하고ᅠ주석을 더하면서 하나의 독립된 텍스트로 <사서(四書)>에 속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그것을 우리는 ‘대학장구(大學章句)’라고도 부르는 거고.

개인 차원의 인식론으로부터 점차 그 범위를 확장해나가며 윤리학, 사회정치철학을 하나로 아우르듯 체계적으로 제시한 경전이다. 즉 성리학이라는 유교 전통의 학문체계에서 공부하는 방법을 담은 경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 <대학(大學)>을 잘 공부하면 자기 자신을 수양하여 안으로는 성인(聖人)의 경지에 오르고, 밖으로는 이와 같은 수신(修身)을 바탕으로 어진 정치를 펴는 임금의 지위에 오를 수 있다고 했다. 이를 이르는 사자성어가 바로 내성외왕(內聖外王)이다. 그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제왕의 모습인 것이다. 

바로 그 <대학(大學)>의 내용 중에 바로 격물치지(格物致知)가 나온다. 이 네 글자의 의미에 대해서도 학파에 따라 해석이 조금씩 다르다. 남송(南宋)의 주자학(朱子學)파와 명(明)나라 중기의 왕명학(陽明學)파가 대표적이다. 그 차이까지 설명? 노! 너무 많아. 패수!

격식 격(格), 만물 물(物), 이를 치(致), 알 지(知)

‘격물(格物)’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사물에 이르다’일 터인데, 여기서는 ‘세상(사물)에 나아가다’라는 의미가 더 적절할 듯하다. ‘치지(致知)’는 말 그대로 ‘앎에 이르다’일 것이고. 그리하야 ‘격물치지(格物致知)’에 관한 그 다양한 해석을 관통하는 것은 ‘사물(세상)에 나아가 그 이치를 깊이 탐구(경험)하여 내 안의 지식을 완전하게 함으로써 궁극의 지혜에 이르는 것’이라 할만하다. 

내 맘대로 해석할 것 같으면, 삶의 태도로부터 삶의 지혜가 나온다!! 즉 개별적 사물을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이 세상의 이치를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하는 만큼 알게 되고 아는 만큼 이 삶을 제대로 살아낼 수 있다는 것일 게다.

조선의 사대부들이 그렇게 금과옥조로 받들었던 성리학의 영향으로 우리나라도 그 유교문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지금의 권위적인 위계질서가 결국 이러한 중국 고전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제도와 관습 곳곳에 배어있는 전통임은 부정할 수 없으리라.

중국 고전을 읽은 덕분(??)에 나의 사고는 기존 질서에 순응하는 것을 미덕으로 알고 살았다. 언제부턴가 ‘주체적 삶’이라는 화두가 던져지면서 예(禮)의 이름으로 우리의 자율성을 제약하는 전통적 관습과 규범에 ‘반항하는 인간’으로 살고 싶어지더라. 그럼에도 ‘공동체적 삶의 태도’만큼은 앞으로도 버리고 싶지 않은, 더 좋은 방향으로 발전시키고픈 유가의 가르침이다. 오랜만에 새내기 시절의 추억을 소환시킨 ‘격물치지(格物致知)’, 그런 의미에서 나의 중국 고전 읽기는 그 고루함에도 불구하고 의미 있었음을.

4 thoughts on “29일차_격물치지格物致知”

  1. 삶의 태도로부터 삶의 지혜가 나온다!! 즉 개별적 사물을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이 세상의 이치를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하는 만큼 알게 되고 아는 만큼 이 삶을 제대로 살아낼 수 있다는 것일 게다.
    – 와~ 이 해석 너무 멋집니다. 너무 못하는 부분이라 너무 공감이 가기도 하고요.^^;;;;
    하지만 역시 전체적으로….제 수준에는 말들이 어렵사옵니다. 좀 더 열심히 익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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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루님^^ 오셨네요? 고맙습니다. 제가 나름대로 해본 해석이 만에 드신다니 제가 더 좋으네요.
      어렵고 재미없는 글이라도 읽고 느낌 공유헤주시니 감사합니다. ㅎ
      저도 또 놀라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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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사물을 보고 이치를 깨닫는다.. 여러가지로 생각해볼수있는거 같아요.. 진짜 한문은 왜 이렇게 어려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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