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일차_장삼이사張三李四

프롤레타리아의 밤. 이 제목에서는 그 어떤 메타포도 보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는 공장 노예의 슬픔을, 누추한 노동자 주택의 비위생을, 통제되지 않는 착취에 의해 고갈된 신체의 비참을 상기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오로지 이 책의 인물들의 시선과 말, 꿈과 이성을 통해서만 문제될 것이다._9쪽(프롤레타리아의 밤 by 자크 랑시에르)

요즘 내가 또 사랑에 빠진 남자, 자크 랑시에르! 프랑스의 철학자다. 안토니오 네그리, 슬라보예 지젝과 함께 21세기에 가장 주목 받는 정치철학자 중의 한 명이다. 그의 박사논문 <프롤레타리아의 밤>의 저렇게 시작되는 서문을 읽자마자 저자에게 홀릭. 이 논문은 19세기 노동자들이 낮엔 고된 노동을 하고 밤을 또 하얗게 밝히며 써내려간 일기, 그들이 시인인 양 끄적인 시 등 다양한 사유의 흔적들이다. 바로 ‘노동자의 꿈 아카이브’인 거다.

거기에 나오는 수많은 장삼이사들의 낭만적인 밤을 엿보며, 노동자가 아닌 시인도 만나고 철학자도 만난다. 마르크스주의자이면서 노동자 계급에 대한 마르크스의 관점을 비판하고 그들을 해방 주체로 재해석한 랑시에르의 섬세한 사유가 참 매력적이다. 난 또 이렇게 멋진 그와 한동안 함께 할 것 같다. 

<프롤레타리아의 밤>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을 가리켜 ‘장삼이사’라 지칭했다. 장삼이사(張三李四), 사전적 의미로는 ‘장씨의 셋째 아들과 이씨의 넷째 아들’이라는 뜻이렷다.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숱한, 이름도 성도 있으나마나한 그런 보통 사람들을 가리키는 성어가 바로 장삼이사(張三李四)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갑(甲)이라는 남자와 을(乙)이라는 여자’, 즉 ‘평범한 남녀’를 가리키는 말로 ‘갑남을녀(甲男乙女)’도 있다는 사실을 함께 기억할 것! 

장삼이사의 그 뜻만큼이나 이 성어를 구성하고 있는 한자의 면면도 평범하기 이를 데 없다. 뭐 설명할 게 딱히 읎다.  

성씨(베풀) 장(張), 석 삼(三), 성씨(오얏) 이(李), 넉 사(四)

‘장삼(張三)’은 ‘장가네 셋째 아들’? 중국어 문법 논문 쓸 때 인용하던 예문에서 정말 자주 보던 이름이다. 중국은 성씨에다 숫자를 넣어서 그냥 편하게 부르는 경우가 많더라. 오만데에 다 숫자를 붙이더라는. 이름 짓기 참 쉬운 기라. 하하. ‘이사(李四)’도 마찬가지다. ‘이가네 넷째’쯤 되나부지. 그러니까 장삼이사(張三李四)는 ‘우리나라 이름으로는 ‘철수와 영수’정도 되려나?

이 말은 송(宋)나라 석보제(釋普濟)의 <오등회원(五燈會元)>에 나온다. 오등회원(五燈會元)은 송대에 혜명(慧明) 등이 편찬한 불교서적이란다. 청(淸)나라 때의 속어를 모은 <항언록(恒言錄)>에도 나온다고도 하더만. 암튼 <오등회원(五燈會元)>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問(문): 如何是佛(여하시불)? 師曰(사왈), “張三李四。(장삼이사)”(부처(佛)가 무엇이냐고 물으니 스승이 답하기를, 모든 중생이라고 했다.)

이 맥락에서는 장삼이사(張三李四)를 ‘중생’으로 해석해도 되지 싶다. ‘중생’이라 함은 불교에서 인간을 위시하여 생명을 가진 모든 생물을 가리킨다. 종교적 의미에서는 부처와 보살과 같은 높은 경지에 도달한 존재와 구분되는, 아직 미혹에 빠진 사람이나 동물을 이른다.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부처와 보살을 다 포함하여 중생이라 하는 경우도 있단다. 

불교에서는 그러잖나. 모든 사람들 각자의 내면에 부처가 산다고 말이다. 그렇다. 부처님의 마음은 우리 각자 속에 들어있단다.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우리가 전념할 때 부처님은 거기(?) 계실지도. 이 말은 행복도 우리 안에 있으니 다른 데서 찾으려 하지 말라고 속삭이는 것 같아 왠지 위로가 된다. 나만 그런가? 하하. 

노동계급 자료보관서에서 우연히 만난 자료에서 랑시에르가 기대한 건 ‘저항의 난폭한 표현’이었다지. 그런데 뜻밖에도 노동자들이 선술집에 앉아 형이상학을 논하고, 밤에는 또 자신들만의 사회주의적이고 인본주의적인 복음을 전하고 있지 않았던가.

거기서 랑시에르는  깨달았다지 않나. 노동자들도 철학과 예술적 글쓰기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것들은 더 이상 지식인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이로부터 지식인과 노동자의 구분이 무의미하며, ‘앎’에 있어서의 평등을 주장하게 되는 거다. 혹자는 이를 두고 지적 혁명이라고 하더라. 그의 이 깊은 통찰의 결과물이 바로 <프롤레타리아의 밤>인 거다. 

나는 랑시에르라는 이 철학자가 진심 궁금해졌다. 이름 없는 장삼이사들, 즉 몫 없는 자들의 몫을 찾아준 그의 사유 세계를 유영해볼 차례인 건가. 하하. 이번 방학이 기대되는 이유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