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베란다 나의 최애 공간에서 아주 얇은 책 한 권을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렸다. 정말 한 큐에 읽히는 그런 책이었다. 요즘 내가 푹 빠진 헝가리 출신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작품집인데, 그녀가 망명 후 수년간 집필한 25편의 짧은 소설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그 안에 수록된 ‘도둑’이라는 소설에서 난 오늘 정말 ‘점잖은 도둑’을 만났다.
자신이 검은 장갑을 낀 손으로 소리도 없이 당신네 집으로 들어갈 수 있으니 문단속 잘하라고 미리 얘기해주는 도둑이다. 자신은 폭도가 아니며, 그렇다고 욕심이 많거나 멍청하지도 않다고 말하는 도둑이고. 이렇게 예의 바른 도둑에게는 진짜루 보석도 뭣도, 정말 그 무엇도 필요치 않아 보인다. 아침에 잠에서 깬 당신은 알게 될 거란다. 다른 건 다 그대로 있고 ‘없어진 것은 단지 당신 일생 중 하루뿐임을.’
이 작가의 글쓰기는 참 독특하다. 어떤 땐 괴기스럽기까지 하다. 삶에 대한 그의 차갑고 건조한 시선 속에서 신기하게도 난 외려 따뜻함이 느껴진다는 게 역설적이다. 그녀의 소설 3부작이 한 권으로 묶인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읽고 난 후의 그 충격, 혼란, 여운…. 그리고 오늘… 그녀의 또 다른 이 소설집을 다 읽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내 일생 중 하루를 도둑맞는 기분은 어떨까 싶은 거다.
또 다시 내 안에 짙은 흔적을 남길 것 같은 이 소설이 나의 마음에 ‘양상군자(梁上君子)’를 들인 이유일 게다. 아고타 크리스토프가 만들어낸 ‘점잖은 도둑’을 부르는 말이 공교롭게도 우리 동양에는 있었다는 사실, 놀랍지 않은가? 그래서 오늘의 성어는 바로 그 의미를 갖는 ‘양상군자(梁上君子)’가 되시겠다.
‘양상군자(梁上君子)’, 이 성어를 딱 듣고 처음 떠오르는 이미지가 어떤가? 성품이 곧고 묵향이 묻어나는 아주 정갈한 선비 같은? 땡!! 틀렸습니다. 저 ‘군자’라는 프레임 안에 갇히셨군요. 그대는. 그럼, 뭐가 정답이오? 한 번 상상해보시죠? 요즘 집들은 대들보가 눈에 보이진 않지만, 일단 한옥집이라고 가정하시고. 바로 그 집의 천장 쪽 대들보 위에 누군가 조심스럽게 앉아 있소. 그 모습이 보인다면 그게 바로 정답일 게요. 당췌 먼 말인지? 하하.
단어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일단 ‘양상군자(梁上君子)’의 한자를 보자.
대들보 량(梁), 위 상(上), 암금 군(君), 사람 자(子)
‘량상(梁上)’은 두음법칙을 적용해서 ‘양상’이 되는데, 그 뜻은 ‘대들보 위’다. ‘군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군자(君子) 맞다. 그래서 해석하면 ‘대들보 위의 군자’다. 이 성어는 ‘도둑’을 점잖게 이르는 말이다. 그래도 그렇지. 도둑을 군자로? 이에 관한 얘기는 <후한서(後漢書)> ‘진식전(陳寔傳)’에 나온다. 이 책은 남조(南朝)의 송(宋)나라 범엽(范曄)이 지은 후한(後漢)의 역사서다.
중국 후한(後漢) 때, 진식(陳寔)이라는 관원이 있었는데, 그는 매사에 아주 공정한 사람이었다. 그의 고결한 덕행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던 터. 어느 날 밤, 그의 집에 도둑이 들었단다. 그는 진즉에 낌새를 차렸으나 모른 척, 평상시 하듯 아들과 손자들을 불러서는 훈계를 시작했더란다. 오마나. 대들보 위에 숨어있던 도둑한텐 날벼락? 우짜겠노. 꼼짝 없이 같이 듣게 됐지.
진식(陳寔) 왈~ 뭐라 했을꼬? ‘사람은 자고로 나쁜 짓을 해서는 안 되느니라.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그리 태어난 게 아니요. 평소 잘못된 습관이 몸에 밴 것이라. 그리 되면 군자가 될 수 있는 사람도 ‘양상군자’가 되는 법이니라. 고개를 들어 보거라. 여기 살아있는 예가 있지 않느냐.’
깜짝 놀란 도둑이 곧바로 들보에서 뛰어내려 와 무릎 꿇고 용서를 빌었다는 거 아닌가. 진식은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그랬다지. ‘자넨 삶이 궁핍해서 그런 거지 절대 악인이 아니야.’라고. 그러면서 비단 두 필을 주었다지 뭔가. 장사 밑천 하라고 말이지. 이 스토리의 화룡점정은 마지막 한 마디. ‘그대도 개과천선하면 군자가 될 수 있다네.’
나중에 그 도둑은 나쁜 습관을 버리고 정말로 열심히 일해서 모두가 칭찬하는 좋은 청년이 되었다고. 이 이야기가 곧 사방으로 퍼지면서 그 고을엔 더 이상 도둑이 생기지 않았다니 정말 대단하지 않나. 바로 이 고사에서 유래한 사자성어가 ‘양상군자(梁上君子)’다. 도둑인 건 맞으나 그를 도둑이 아닌 미래의 잠재적 군자로 봐준 진식(陳寔)에게 고마워지는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참 멋진 어른이다. 진짜 어른은 저런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진식陳寔)의 고사를 읽는 내 마음에 잔잔한 떨림이 느껴진다. 그것은 곧 울림이 된다. 자신의 방에 물건을 훔치려고 들어온 도둑의 비루한 삶을 저토록 점잖게 대우해준 그 힘이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고 애정임을 알기에…
이 타이밍에 다시 한 번 궁금하다. 내 일생 중 하루를 도둑맞는 기분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