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차_관포지교管鮑之交

오늘의 주제는 ‘우정’이다. 그리하야~ 오늘의 사자성어는 ‘관포지교(管鮑之交)’ 되시겠다. 글자 그대로 ‘관중(管仲)과 포숙아(鮑叔牙)의 사귐’이라는 뜻이다. 이 표현 속 한자는 별 의미 없이 그저 두 친구 이름의 첫 글자에서 따온 것이다. 중국 춘추시대에 살았던 이 둘의 고사는 중국의 역사서 <사기(史記)>에 기록된 아주 유명한 이야기다. 

가난한 집안 출신인 관중과는 달리 제(齊)나라 명문가의 후예였던 포숙아는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친구와 함께 나눌 줄 아는 멋진 사람이었다. 관중은 또 어떤가. 그는 포숙아의 추천으로 제나라 환공(桓公)의 재상(宰相)이 되는데, 환공을 중국 최초의 패자(霸者)이자 가장 강력한 군주로 만들어준 재상 중의 명재상이었다. 

친구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의 뒤에서 묵묵하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나, 자신은 정작 조용하게 살았던 포숙아, 나는 <사기(史記)>를 읽으며 그의 사람됨에 푹 빠졌드랬다. 그의 여일함 속에 깃든 진중함이 좋았다. 친구의 허물까지도 끌어안고 결코 비난하지 않는 그 넉넉함이 참 좋았다. ‘이게 진정 친구지!’ 나를 감탄하게 했던 일화가 얼마나 많았던고. 여기에 다 소개하지 못함이 한스러울 뿐.

중국의 한 철학자는 관중과 포숙아의 관계를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우정에 비유한 적이 있다. 마르크스는 평생 정식 직업 하나 없이 살았지만, 그에게는 아주 든든한 친구가 있었으니. 위대한 사상가로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그의 성공 뒤에는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친구 엥겔스가 있었다. 엥겔스가 ‘뜻을 같이 하는 친구의 재능을 인정해주고 평생 변치 않았던’ 의리파라는 점에서 포숙아와 많이 닮아있다. 관중과 포숙아든, 마르크스와 엥겔스든 이들의 동지적 인연은 시대를 넘어 감동을 준다.

‘관포지교(管鮑之交)’에서 중요한 것은 이 단어가 단순하게 ‘친구 사이의 우정’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이런 관계가 가져다주는 ‘상호 이해와 존중’에 그 방점이 찍힌다는 거다. 즉 그저 친구들 사이에 있을 법한 그 흔한 관계를 넘어서 더 높은 수준의 동료애와 연대를 의미하는 성어라는 얘기다. 참 귀한 가르침이다. 

음… 이대로 끝내기가 좀 아쉬운 이유는 뭘까나. 그건 아마도 친구간의 돈독한 우정을 표현하는 그 많은 사자성어만큼이나 할 얘기도 많아서일 게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성어 몇 개만 더 소개하고 마칠까 하노라. 하하.

일단 ‘막역한 사이’라는 익숙한 말이 먼저 떠오르는 ‘막역지우(莫逆之友)’다. ‘허물이 없는 친구’라는 뜻이다. 이런 친구 있음 정말 좋지. 황금처럼 단단한 우정도 있단다. 와… 얼마나 굳건하기에? 부럽다. 바로 ‘금란지교(金蘭之交)’가 가리키는 우정 말이다. 이 성어는 ‘황금과 같이 단단하고 난초 향기와 같이 아름다운 사귐’을 이른다. 참 멋진 표현이다. 이외에도, 지란지교(芝蘭之交), 수어지교(水魚之交), 죽마고우(竹馬故友), 지기지우(知己之友), 문경지교(刎頸之交)… 쌔고 쌨다.  

저렇게 많은 ‘우정’ 관련 표현 중에 나의 최애 사자성어는 ‘백아절현(伯牙絶絃)’이다. ‘절현(絶絃)’은 ‘끊을 절(絶), 악기 줄 현(絃)’으로 ‘줄을 끊다’의 뜻이다. 물론 백아(伯牙)는 사람 이름이고. 그래서 전체적으로는 ‘백아가 거문고 줄을 끊는다’의 의미로 ‘자기를 알아주는 절친한 벗의 죽음을 슬퍼함’을 이르는 말이다. 

백아와 종자기의 슬픈 고사 때문일까? 이 표현만 보면 나도 모르게 애틋한 감정이 밀려온다. 아… 이 스토리는 언급 안 하고 넘어갈 순 없겠다. 그럼 짧게?

거문고를 정말 잘 타는 ‘백아’와 그의 거문고 소리를 정말 좋아해준 ‘종자기’라는 친구가 있었다. 종자기는 백아가 무엇을 연주하든, 그 거문고 소리만 들으면 곧바로 백아가 표현하고자 한 바를 정확하게 알아맞혔단다. 여기서 ‘소리(音)를 알아듣는다(知)’는 뜻으로, ‘자기의 속마음을 알아주는 친구’를 이르는 말인 ‘지음(知音)’도 탄생했으렷다(이 표현도 함께 기억!!). 

그 후, 종자기가 병으로 죽자 백아는 친구의 무덤 앞에서 연주한 곡을 마지막으로 거문고 줄을 끊어버렸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고. 이 세상에 자신의 거문고 연주를 알아줄 사람이 더 이상 없었으므로. 

‘백아가 줄을 끊는다’는 그 무미건조한 표현에 이토록 슬픈 사연과 깊은 의미가 있을 줄이야. ‘백아절현(伯牙絶絃)’, 지금도 친구를 떠나보내던 백아의 슬픔이 고스란히 전해오는 것만 같다. 여전히 감동이다.

살다보면 누구라도 절망하는 순간은 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숱한 좌절과 슬픔이 그저 고통으로만 끝나지 않는 건 묵묵히 내 곁을 지켜주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리라. 온 마음을 다해 나와 함께 견뎌주는 든든한 친구가 있음에 우리는 그 시간들을 건너갈 수 있음이라. 언제든 내 편인 친구가 있는 한 제 아무리 힘든 일이 닥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용기낼 수 있을 테니. 이 가을에, 우리 모두 그런 친구가 되어봄이 어떠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