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손자병법(孫子兵法)>이라는 중국의 가장 오래된 병법서에 대한 얘기로 시작해야겠다. 갑자기 웬 병법서? 오늘의 사자성어를 ‘지피지기(知彼知己)’로 정하고 나니 그 원전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는 거다. <손자병법>을 그저 중국의 대표적인 병법서로만 알기에는 이 책이 품고 있는 분야가 너무 광범위하다. 그러니 서양에서는 군사학 교재로뿐만 아니라 인문학 고전으로 읽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손자병법>이 그 수많은 중국 고전 가운데 세계에서 “Art of War”라는 고유명사만으로도 통하는 책이라는 것은 안 비밀!!
서두에 언급했듯이, <손자병법>은 고대 중국의 전쟁 기록을 총 13편으로 집대성한 병법서다. 이 책의 저자로 알려진 손자(孫子)는 기원전 6세기경 중국 춘추시대 제(齊)나라 사람으로서 당대 최고의 책략가다. 본명은 손무(孫武)인데, 후학들이 그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선생님’이라는 뜻의 ‘子’를 붙여서 ‘손자(孫子)’라 불렀다. 그가 남긴 책의 이름도 원래는 <손자(孫子)>였으나, 나중에 ‘병법(兵法)’이라는 말을 붙여 <손자병법(孫子兵法)>이 된 것이렷다. 군사이론서의 바이블 같은 책인 <손자병법>은 현대에도 여전히 군사정책은 물론 국가경영과 기업관리 등에도 응용되고 있다.
그럼, 이쯤에서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지피지기(知彼知己), ‘너를 알고 나를 안다’는 뜻이다. 보통은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고 알고 있을 테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 백 번 이긴다’는 그 문장 말이다. 이 댓구가 너무 굳어져서 이제는 아주 자연스럽게 나란히 사용된다. 하지만, 원전을 보면 우리가 흔히 알고 이 표현과는 조금 차이가 난다. <손자병법> 3장 모공(謀攻)편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요_知彼知己, 百戰不殆_‘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부지피이지기’면 ‘일승일부’며_不知彼而知己, 一勝一負_‘적을 알지 못하고 나를 알면 한 번 이기고 한 번 진다.’
‘부지피부지기’면 ‘매전필태’니라_不知彼不知己, 每戰必殆_‘적을 모르고 나를 모르면 싸울 때마다 반드시 위태롭다.’
여기서 유래한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의 한자 구성은 요렇다.
‘알 지(知), 저 피(彼), 알 지(知), 자기 기(己), 일백 백(百), 싸울 전(戰), 아니 불(不), 위태할 태(殆)’
‘지피(知彼)는 ’상대(彼)를 아는(知)‘ 것, ’지기(知己)‘는 ’자신(己)을 아는(知)‘ 것을 의미한다. 백전(百戰)은 ’백 번 싸운다‘는 것이며, 불태(不殆)는 ’위태롭지 않다‘는 뜻이다. 즉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음이다.
상대편과 나의 장단점을 충분히 알고 승산이 있을 때 싸움에 임하면 이길 수 있다는 거다. 어떤 경쟁이나 대결에서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해 기고만장해서도 안 되고, 상대의 전력과 상황에 대한 파악 없이 무턱대고 덤벼서도 안 됨을 경계하는 말이다. ‘상대편(彼)’과 ‘나(我)’라는 쌍방의 역량을 충분히 비교한 후에 상대의 힘과 의지를 역이용함으로써 비용과 희생을 최소화하는 승리법은 얼마나 합리적인가.
손자(孫子)는 전쟁이라는 것을 군사적 관점에서만 접근하지 않고 사회 전반의 현상과 밀접한 관련을 지어 인식하였다. 군사는 정치의 연장이요, 전쟁은 정치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인 거다. 그러니 반드시 전쟁이 문제 해결에 있어 최선의 방법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객관적 상황 판단을 중시했던 손자의 ‘현상을 통해 본질을 꿰뚫는 태도’는 놀라울 만큼 과학적이다.
그럼에도 <손자병법> 전체를 관통하는 사상은 그 어떤 상황도 고정된 것으로 획일화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노자(老子)>의 그것과 닮아있다. 모든 것을 변화와 생성의 과정 속에서 파악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말이다.
경영의 필독서로 활용된다는 <손자병법> 얘기를 하다보니, 지금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나의 생각으로는 사람의 인생을 하나의 기업에 빗대면 자기 경영이라는 말도 아주 그럴 듯해 보인다. 기업을 무한경쟁의 생태계에서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그 기업만의 경영전략이 요구되는 것처럼 우리도 이 험난한 세상에 던져진 이상 무사히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떤 전략이 필요할 테니 말이다.
태생적으로 자기 안에 잉태되었을 모든 가능성을 알아채고 그것을 밑천으로 ‘나’라는 최고의 걸작을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이 생을 걸고 해볼 만한 일이 아닐까 싶다. 혹자는 이것을 한 변화의 주체가 자신의 전 역사를 통해 성취해야 할 필생의 프로젝트라고 하더라. 변화는 모든 생명의 존재방식이라 하지 않던가. 그 순간순간 변화하는 주체로서의 한 사람이 본래의 자기가 되기 위한 실천적이고 창조적인 변화가 자기 경영이라는 것이다. 이 논리대로라면 사람과 변화라는 화두는 자기 경영으로 종합된다고 할 수 있으리라.
기업의 리더는 변화무쌍한 기업 환경 속에서 조직이 그 변화에 잘 적응하여 균형과 조화를 이루게 함으로써 조직의 효율성을 끌어올려야 하는 책무를 지고 있다. 날로 치열해지는 경쟁 속에서 급변하는 전략과 함께 미래의 방향이 모호해지는 상황에서 리더의 역할이란 구성원들에게 변화의 방향을 이해시키고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것이다.
‘나’라는 기업에서 나는 변화의 주체이자 객체이다. 그러니까 ‘나’라는 기업의 리더인 나는 매 순간 변화의 방향을 정확하게 읽고, ‘나’라는 조직의 구성원이기도 한 나에게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당위성을 설득시켜야 한다.
무한경쟁 사회에서 성공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과연 행복한 삶인가에 대한 물음표 끝에는 자기 성찰이라는 숙제가 따라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연 ‘나’라는 기업의 성공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의 문제다. 사람들이 정해놓은 기준이 아니라, 나만의 비전과 목표가 있느냐다.
그렇다면 나만의 비전은 어떻게 구현되는가? 이 비전 구상은 우선 나를 면밀히 관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면 어떨까? 다시 ‘지피지기(知彼知己)’로 돌아온 건가? ㅎ 나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어찌 상대를 안다고 할 수 있겠나. 고통의 바다(고해)로 은유되는 이 생의 한 가운데서 누구나 자신만의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으리라. 그 과정에서 위태로움을 최소화하고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은 ‘상대를 아는 것’과 동시에 ‘나를 아는’ 게 반드시 동반되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