子曰, 温故而知新,可以爲師矣(자왈,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공자 왈, 옛 것을 익히고 새 것을 알면 스승이 될 수 있다.
논어의 위정(爲政)편에 나오는 말이다. 온고지신(温故知新), 이 표현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따뜻할 온(温)’, ‘연고 고(故)’, ‘알 지(知)’, 새 신(新)’
중국 송대의 유학자 주자(朱子)는 ‘온고지신’을 ‘옛 것을 부지런히 익히고 새로운 것을 안다’고 해석했다. 이것이 어쩌면 가장 보편적인 해석이 아닐까 싶다. 조선시대의 다산 정약용은 ‘따뜻할 온(温)’을 예전에 배워 이미 차갑게 식은 것들을 복습해서 다시 따뜻하게 데운다는 의미로 주석을 달았다.
‘온고(温故)’의 ‘고(故)’와 ‘지신(知新)’의 ‘신(新)’을 과거와 현재, 즉 시간의 개념으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반면, 조선후기의 제22대 왕이었던 정조는 ‘고(故)’를 ‘옛날 읽은 책’으로 본 듯하다. 그는 한 번 읽은 책을 다시 읽게 되면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이 말은 옛 것을 깊이 파고들어가면서 그 안에서 새로운 이치를 찾아내어 배운다는 의미일 게다. 그러니까 정리해보자면, ‘온고지신’이라는 말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옛 것과 새 것을 배우고 안다’는 해석과 ‘옛 것을 익히는 가운데 새롭게 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ᅠ
고문(古文)이 이래서 어렵다. 동일한 텍스트라 할지라도 어떤 관점에서 누가 어떤 의도로 보느냐에 따라 해석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음이다. 이것은 비단 번역의 문제에 국한된 것만은 아닐 듯하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이와 같은 이치이지 않을까 싶다. 고정된 하나의 진리는 없다는 것,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화 속에 있다는 말이 새삼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이유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너무 쉽게 단정하고 확신하는 것들이 얼마나 덧없고 위험한 것인지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된다.
온고지신, 이 너무도 익숙한 사자성어가 갖는 현재적 의미는 우리가 추구하는 혁신이니 창조니 하는 것들이 결국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나온다는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창의성은 이전엔 존재하지 않던 어떤 것이 어느 날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그동안 자신이 보고 경험했던 것을 차갑게 식은 채로 놔두지 않고 그것들을 부단한 사유를 통해 따뜻하게 데울 때, 그 과정에서 새롭게 활성화될 수 있다는 의미인 거다.
‘온고(温故)’와 ‘지신(知新)’을 대립 개념으로 보기보다는 연속선(Continum)의 관점에서 이해하고자 하니, 문득 이 ‘온고지신의’ 현대적 해석 속에서 ‘자기경영’의 가능성도 보이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살면서 ‘온고지신’을 제대로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이 당연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자성어에서 나는 이렇게 또 새롭게 뭔가를 깨닫고 있는 중이다. 이 역시도 ‘온고지신’인 거다. 공자님께서 바로 우리 일상에서 숱하게 있어왔을 이러한 경험들을 ‘온고지신’으로 멋지게 갈무리한 거구나. 그러니까 공자님은 그 오래 전에 우리가 무엇을 하든 온고지신이 가능할 때 얼마든지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이치를 설파하셨던 거네.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해온 경험에 기대어 이 성어를 바라보니 정말 맞는 말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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