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가 주문했던 대로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찰나 속에 영원을 담을’ 수 있을까? 정말 그렇게 하면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볼’ 수 있으려나? 우리 주변의 아주 사소하고 초라한 것들로부터 무한한 가능성을 꿈꾸는 시인의 마음이 전해지는 것만 같다. 이 시인을 무한 애정했던 ‘혁신’의 아이콘 스티브 잡스는 어쩌면 우리의 손안에 아이폰을 쥐어줌으로써 인류에게 무한을 선물했는지도 모르겠다. 작금의 이 초연결 지능화 시대의 8할은 잡스에게 빚지고 있으니까.
우리는 AI가 모든 산업을 재정의할 것이라고 호언하는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분초 단위로 달라지는 듯한 초고속 혁신이 미덕인 그런 환경 속에 놓여있다는 얘기다. 이러한 변화에 저항하며 자신만의 신념에 우뚝 서서 독야청청하기엔 그로 인해 견뎌야 하는 세상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 나를 둘러싼 환경은 모든 게 다 변해 가는데, 나 홀로 제자리에서 의연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이 순간 문득 ‘각주구검’의 이야기가 내게로 온 까닭일 게다.
각주(刻舟)는 새길 ‘각(刻)’에 배 ‘주(舟)’, ‘배에 새긴다’는 뜻이다. 그럼, 구검은 뭐냐? 구할 ‘구(求)’에 칼 ‘검(劍)’으로 ‘칼을 찾는다’는 의미다. 이 말의 함의인즉슨 ‘융통성 없이 현실에 맞지 않는 낡은 생각을 고집한다’는 뜻으로서, 세상일에 어둡고 어리석음을 꼬집는 표현이다.
이 성어는 중국 고대 초(楚)나라의 한 젊은이의 고사에서 유래되었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던 한 젊은이가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그만 실수로 손에 들고 있던 칼을 강물에 빠뜨리고 만다. 당황한 젊은이, 허둥지둥 주머니칼을 꺼내더니 뱃전에다 표식을 새기는 거다. “여기는 내 칼이 떨어진 곳!”이라며 말이다. 나름 칼이 떨어진 곳을 기억하기 위함이렷다. 배가 나루터에 닿자, 젊은이는 대뜸 칼을 찾겠다며 배에 표시된 곳의 강물 속으로 뛰어든다. ‘배가 움직인 건 생각 안하는 겨? 이 어리석은 친구야~’
‘각주구검’은 중국의 고전으로 알려진 여씨춘추(呂氏春秋) 찰금편(察今篇)에 나오는 말이다. 이 네 글자 위에 내 시선을 가만히 얹는다. 그리고 나를 돌아본다. 내 안에도 저 어리숙한 젊은이가 살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난 여전히 옛 자리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지 자문해본다. 내가 그동안 옳다고 믿어왔던 신념이 달라진 시대 속에서도 여전히 유효한지 자기검열을 하게 된다는 의미다.
시쳇말로 나이든 사람들이 살기 너무 힘든 시대라고들 한다. 숨가쁘게 변화하는 세상을 따라잡기가 그만큼 고단하다는 얘기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그 나이든 사람축에 끼어 허방을 해매 듯 이리저리 흔들리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들 속에 유영하며 나만의 방식만을 고집하는 그런 고루한 사람으로 나이 들고 싶지 않다는 거다. 매순간 각주구검의 우(愚)를 범하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하는 이유이리라.
한 송이 들꽃에서도 천국을 볼 수 있는 넉넉한 마음 한 켠에 이 작은 소망 하나를 심는다. 나의 일상적 삶을 돌아보며 조심스레 나를 추스르는 이 순간에 감사하며~
각주구검이라는 사자성어를 처음 배웁니다. 변해가는 세상에 모든것이 그것에 맞게 호기심ㅇ를가지고 변해야되는데 예전에 생각을 고집하고 변화하고 배우고 호기심을 가지기를 게을러하는 제 모습을 봅니다. 흘러가는 물은 늘 새로운 물인데, 그리고 그런 물이 생명살리는 깨끗함을 유지하는것인데, 흘러가는것/ 움직이는것을 싫어하는 배움의 나태로움을 지적당하는것 같아 “꿈찔” 합니다. 좋은 내용 감사합니다.
샘~ 제 글을 읽어주시고 느낌 공유해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샘만큼 배움에 진심인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을만큼 샘은 정말 늘 열심히 열정적으로 사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저도 그 뒤를 따라가고 있는지도 몰라요. 덕분에 느리지만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또한 고맙습니다. 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