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미의 [0원으로 사는 삶]

작가와의 인터뷰…


갈수록 개인화되고 파편화되어가는 요즘 시대에, ‘우리는 하나다’라는 굳건한 믿음 위에 서서 이 세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한 사람이 있다. 그리고 사랑의 메시지를 세상에 전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며 그 작업을 해나가고 있는 한 사람, 바로 박정미 작가다. 최근 내가 온통 집중하고 있는 삶의 방식이기도 한 ‘0원으로 살기’를 혈혈단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몸소 실천한 사람이다. 그런 용기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 ‘사람’이 궁금해졌다.

올 2월엔 그의 에세이 [0원으로 사는 삶]이 ‘올해를 빛낸 아시아의 책’에 선정되더니, 이제 그 책을 탄생시켰던 ‘0원으로 살기 프로젝트’의 실제 체험 현장을 담은 동영상으로 영화까지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바로 그 영화 [담요를 입은 사람]이 한국경쟁부문 신설 상인 배급지원상을 수상했다. 어디 그뿐인가. 지난 5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데 이어 최근엔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비경쟁부문에 초청되었단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영화 전공자도 아닌 그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카메라에 담은 동영상을 직접 편집해서 만든 영화가 최초 공개된 자리에서 많은 관객들을 울렸다고. 구도자의 길을 방불케 했던 그 힘든 여정에서 그가 만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방식, 그들과의 진솔한 소통이 만들어낸 끈끈한 유대와 그 속에서 전달되는 사랑과 자비, 연민 등의 감정이 고스란히 관객들의 마음에 가 닿은 이유이리라.

2시간 동안 그 숱한 장면들을 연출하며 감동적으로 영화를 이끌어가는 박정미 작가는 현재는 과연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지리산 자락 전남 구례의 숲속 작은 집에서 자연과 벗하며 자급자족하는 삶 속에 놓여있던 그가 얼마 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참석 차 서울에 올라왔다. 그를 성수동 한 비건 카페에서 만났다.

그의 에세이 [0원으로 사는 삶]에서, 그는 2014년부터 2016년까지 2년간의 0원 살기 프로젝트가 자신을 가슴이 원하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변모시켰다고 했다. 자기 삶의 주인이고 싶은 누구라도 한 번쯤은 ‘가슴이 원하는 일’을 꿈꿔봤으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그 꿈을 이룰 수는 없는 법, 진입장벽이 높은 그 어마무시한 프로젝트 도전은 ‘두려움 극복’을 위한 결단이었단다. 우리의 삶이 두려움의 연속이고, 그 안에서 계속 불안하게 살아가던 그는, 어느 날 문득 차라리 그 두려움 속으로 직접 들어가보면 어떨까 싶더란다.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정면 돌파하는 방법읕 택한 것이다. 그 경험은 그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전에는 생각해본 적 없던 ‘소비 없는 삶’을 지향하는 지금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그는 현재만 살기 때문에 미래가 불안하지 않단다. 이제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그, 그렇다면 지금 그의 화두는 무엇인지 그것이 또 궁금해졌다.

영화제작을 다 마치고 난 후, 여러 영화제에 초청되고 여기저기서 강연 의뢰가 오고… 조용하던 삶이 많이 바빠졌다고 운을 뗀 작가는 요즘 자신의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는 생각들을 담담하게 꺼내놓았다.

“어떻게 살아야 하지? 세상에 어떤 메시지를 주며 살아야 하나? 이 문제에 대해 10년 동안은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어요. 저는 ‘0원 살기 프로젝트’를 체험했던 30세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은 줄 알았는데… 이 세상이 자비와 연민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리는 역할을 하기엔 내 안에 부정성이라고 할 수 있는 욕망과 불순물이 너무 많더라구요. ‘내가 과연 사랑의 메시지를 담아 세상에 알리는 그런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인가’ 라는 질문을 계속 하고 있어요.”

1년 전부터 ‘수행하는 불교’인 초기 불교를 열심히 공부하고 있단다. 마음이 복잡할 때면 선원으로 달려가기도 한다고. 그곳엔 지혜로운 스승님의 가르침이 있기 때문이란다, 처음엔 종교를 거부하는 마음도 있었거니와 시스템으로서의 종교는 선택하고 싶지 않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이 자신이 갖고 있던 자만을 확 비춰주는 깨달음의 순간이 있었다고. 지금은 선원에서 명상하고 법문을 많이 듣고 있단다. 그리고 요새는 ‘출가해야 하나’ 고민하는 중이란다. 소명에 따라 살려고 하면 할수록 자신 안의 오염된 욕망에 끄달리는 스스로가 보여서 괴롭단다. 그동안의 고민이 결국 여기로 연결되는 게 아닌가 싶단다. 출가자의 마음으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살아야 하나? 그 고민의 답은 이 방법, 즉 출가밖에 없는 것 같다고. 세속적 욕망을 포장해서 살아가는 스스로를 더 이상 인정할 수가 없게 됐다는 거다. 그 욕망을 들키는 것이 두려웠던 건 아닐는지. 그렇다면 이제는 정말 선택을 해야 하는 때가 온 게 아닐까 자문하는 중이라고. 욕망을 인정하고 세속에서 계속 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다 내려놓고 수행의 길을 갈 것인가?

작가의 담담한 자기고백 같은 말을 들으면서 내 마음은 조용히 요동쳤다. 이렇게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게 참 신기했다. 현재 불교철학에 빠져 살고 있는 나 역시도 그런 고민 속에서 방황하는 중이었으니까. 인생의 반환점을 돈 시점에 갑자기 찾아온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 공부하기 시작한 현대철학이 나를 불교철학으로까지 인도했던 것이다. ‘상처는 나의 체질’이라던 어느 시인의 시를 읽다가 나도 모르게 ‘우울은 나의 체질’이라는 혼잣말을 수없이 되뇌던 계절을 지나 이제는 내 안에 안착했거니… 그런데 아니었다. 나를 완벽하게 쓰러뜨리지 못한 겨울의 끝에서 기사회생한 나는 아직도 어디로 가야할지 하염없는 번뇌 속을 걷던 중이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일은 마음이 짓는 거다’라며 내 마음을 애써 다독이지만, 그럴수록 막연한 믿음이 내게 손짓한다. ‘내 안의 나’가 살아있는 한은 절대 자유로워질 수 없을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 말이다.

박 작가는 말한다. 숲에서 혼자 살면서 자유를 찾은 줄 알았다고. 하지만, 그저 어떤 환경을 벗어나있었을 뿐이란 걸 깨달았단다. 어떤 장소나 시스템, 상황 같은 건 중요한 게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어디에 있든 내 마음이 문제구나 싶더란다. 극단적인 상황을 그저 참아내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진정 자유로워지는 것이라고.

물론 지금도 숲속에서 선을 지향하면서 사는 것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 자체가 결국은 회피하는 삶일 뿐이라고. 결국 내 맘 편하려고 혼자 있는 것이란다. 그러니 진정 자유롭고자 한다면, 나를 불편하게 하는 모든 것들을 마주하고, 나의 것을 다 내려놓고 나를 없애가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진짜 자유는 내 몸이 피곤해도, 내가 힘들어도, 내가 해야 하는 것을 위해 절제하고 내 몸을 훈련시키는 그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이란다. 욕망에 기반한 자유는 끝이 안 난다는 거다. 뭐가 있어야만 충족되는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고. 불편함, 불만족이 없는 자유, 그것은 내가 없어야만 가능한 자유란다. 고통의 원인, 모든 것은 변하기 때문에 불충족이 있는 것이라고. 그래서 부처님은 ‘무아(無我)’, ‘내가 없다’고 한 것이라고. 우리가 끊어내야 할 것은 괴로움이고, 그것은 나를 없애는 방법뿐이란다.

나를 없애는 길, 무아라…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하는 게 정말 그것일까? 그동안 철학자들이 그토록 외치던 ‘나로 사는 법’은 그러면 의미가 없다는 건가? 내 삶의 주체가 되어야 자유롭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나를 지우는 방법이야말로 진정 자유로워지는 거라니… 혼란스러웠다.

이 세계 내에서 벌어지는 어떤 현상을 바라보는 태도는 사람들마다 각기 다르다.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본다. 그렇게 세상으로 향한 시선을 나에게로 돌려 나의 의식을 살피고자 할 때 필요한 게 뭘까? 독일의 철학자이자 현상학의 창시자인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은 우리의 일상적 사유로는 포착하지 못했던 대상의 본질을 자신의 순수한 의식으로 직관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현상학적 태도인 거다. 여기서 현상학적 태도로 본다는 것은 멀리 떨어져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한 걸음 물러나서 관찰자의 태도를 가진다는 것, 그것은 초월적 자아를 발견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게다.

그러면, 무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하여 생기는 상관관계의 원리’라 할 수 있는 ‘연기(緣起)’의 관점에서도 얘기해볼 필요가 있겠다. 불교 교리인 연기설(緣起說)에선 모든 것은 인연(因緣)이라는 원인에 따라 관계에 의해 존재할 뿐, 나라고 말할 만한 개별적 실체가 없다고 본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그것이 생겨날 원인과 조건이 맞춰져야 한다는 거다. 나라는 존재 역시 나를 있게 하는 어떤 실체나 본질이 따로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원인과 조건에 의한 결과로써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인과 조건이 맞춰지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고, 또 나를 존재하게 한 원인이 사라지면 나라는 존재도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들어봤을 게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관계를 벗어나 존재할 순 없다는 뜻이다. 모든 것이 관계로 인해 존재한다는 것. 이 말 뒤에 따라올 얘기가 연상되지 않는가? 맞다. 관계망이 존재할 뿐 나라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으니, 나라는 존재에 대한 집착과 욕망을 버리라! 거기서 벗어나 모든 것이 텅 비어 있음(공:空)을 깨닫게 될 때, 진정한 행복에 이르게 되나니.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망상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는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게다. 이 우주의 모든 존재 현상은 변화한다. 고정된 실체가 될 수 없으니 그래서 공(空)이다. 그저 비어있다는 거다. 바깥에 있는 모든 대상은 서로 ‘인(因)’과 ‘연(緣)’에 의해 관계 지어지며 형성된다. 모든 것이 연기되어 있고 실체로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 공(空) 개념은 부처의 깨달음을 연기론으로 해석한 것이다. 실체가 없는 것을 ‘존재’라고 말할 수 없으니 ‘공’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완전히 없다고도 할 수 없으니 또 ‘절대 무(無)’도 아닌 거다. 공 개념은 그러니까 ‘절대 무’도, 그렇다고 ‘존재’도 아니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모든 존재는 그저 은폐되어 있다가 탈은폐 되는 것일 뿐이라고 한 말이 이해가 될 것도 같다. 존재자는 다른 존재자와의 관계를 통해 생성된다. ‘있음’도 아니요 ‘없음’도 아니다. 양극을 넘어선 그 관점에서 공이라고 했단다. 앞에서도 몇 번 강조했지만 공으로서 나타나는 이 세계의 모든 존재 현상들은 우리의 인식 없이는 드러나지 않는다. 인간의 인식이 없이는 존재도 없는 것이다. 그렇지. 우리 인간의 바깥에 존재하는 현상들은 우리 마음속으로 들어오고서야 존재한다고 할 수 있지. 아… 난 지금 뭐라는 것이냐? 선문답에 빠져버린 나? 그래도 내가 하고픈 말은 이거다.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욕망하고 특정한 대상에 집착하고 또 아집에 빠지기도 한다. 그렇게 된 인간은 결국 망상 속에서 불선업(不善業)을 짓게 된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청정한 마음 또한 그 저변에 깔려 있단다. 바로 인간의 무의식은 불선업을 선업(善業)으로 바꿀 수 있는 엄청난 힘도 가지고 있다는 거다. 이처럼 불교는 이미 프로이트와 융보다 훨씬 이전에 수행을 통하여 들여다봐야 하는 대상의 저장소로서 무의식을 얘기했다는 거다. 거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수행을 통해 불선업을 선업으로 바꿔서 청정한 마음을 갖게 된 자는 타자에게 나아가야 한다고 가르쳤다. 깨끗한 마음을 얻고 나 혼자만 행복한 게 아니라, 이웃의 고통에 눈감지 않는 자비심을 갖고 타자로 향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이 나에겐 감동인 거다.

‘인간은 본래 악해!’ 라고 치부하며 포기할 수도 있었으련만. 인간 내면의 저 깊은 곳에 숨겨진 선한 씨앗의 발현가능성을 믿어주는 것만 같아서 고마웠다. 우리는 업을 안 짓고 살아갈 수는 없다. 다만 내 업, 그러니까 흔히 말하는 이 까르마의 경향성을 살피고 심층적 내면을 들여다보며 수행을 통해 나를 변화시킬 수 있다면, 까르마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닐 수 있다. 칼 융이 우리 무의식에서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견한 것처럼 나 또한 이제는 까르마를 조금은 다른 시각으로 대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불교에서 가르쳐준 ‘까르마와 슬기롭게 동행하는 법’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수행을 통해 집착에서 해방된 자의 그 청정한 마음이 타자를 향하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 전제 조건은 마음이 비워져야 한다는 것!! 이것을 가슴에 새기고 나 역시 그리 살도록 늘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하는 순간이다. 순전한 마음으로 타자에게 나아갈 수 있기를~

글을 마무리 하려고 보니 얘기가 어쩌다 흐르고 흘러 결국 나라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교의 무아(無我) 사상에까지 오고야 말았다. 암튼… 여기서 또 고개를 드는 엉뚱한 생각 하나…^^ 연기론에 따르면, 우주의 삼라만상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한다. 우주의 모든 물질은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작금의 네트워크의 무한 확장으로 인한 초연결시대는 필연적 결과인 건가?? 그건 모르겠고. 확실한 건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러니 더불어 다 함께 잘 살 수 있는 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바로 박정미 작가가 굳게 믿고 있는 ‘우리는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박 작가가 지향하는 삶은 우리 인간 내면에 본래 가지고 있던 그 신성한 어떤 것을 깨닫는 삶이 아닐까, 그것이 바로 영성 라이프인 거고. 자신의 욕망을 마주하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끊임없는 수행을 하고 있는 박 작가에게서 뭔지 모를 숭고미가 느껴졌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맑고 경건할 수가 있지?

영성 라이프에서 가장 중요한 건, ‘나는 누구인가’를 깨닫는 과정인 거다. 이 깨달음이 바로 내 안의 영성을 깨우는 것인지도. 그 과정에서 필요한 최고의 가르침을 사람들은 종교를 통해서 배우고자 하는 게 아닐는지. 출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박정미 작가처럼 말이다. 숨 가쁘게 흘러가는 하루하루를 살아내야 하는 현대인들에게 마음의 쉼터, 그리고 ‘내 마음 알아차림’의 훈련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 느낌이다. 삶이 버겁고 고단한 사람들, 마음이 아프고 공허한 사람들을 편안함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영성 라이프가 페티시즘(fetishism, 物神化)에 속박된 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이유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