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와의 토리노 데이트 5
니체의 철학을 한 마디로 요약하라면 ‘모든 가치의 전도’다.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모든 상식을 다 깨부수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었다는 얘기다. 지금까지 너무 당연시되던 것들을 그 근본부터 파고들며 새롭게 해석하고 다른 눈으로 볼 수 있는 관점의 전환을 가져온 사람이 바로 니체다.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의 모든 인식은 해석임을 깨닫게 된다. 사람들 각자의 눈 속으로 들어온 이 세계는 수만 가지의 빛깔로 채색된 풍경일 수 있다. 천 개의 눈에 담긴 천 개의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굳게 믿어왔던 기존의 가치를 전복하고 해체시킨 철학자가 바로 니체다. 아니, 니오다.
지오: 니오, 사람들은 ‘프리드리히 니체’ 하면 ‘신은 죽었다’라는 말과 ‘허무주의’를 가장 먼저 떠올립니다. 귀하의 책을 안 읽어본 사람도 이 짧은 명제는 다들 알고 있을 거예요. 그 정도로 유명하지요.
니오: 내가 정말 그렇게 유명해졌습니까? 내 그럴 줄 이미 알았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군. 그런데 ‘신죽음’이 내 철학의 다가 아닌데 그 명제만 기억한다니 그건 좀 서운하네.
지오: 그러니 오늘 니오의 생각들을 직접 들어보고 싶은데. 책을 통해 만난 니오를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니오를 제대로 알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사실 ‘신죽음’에 대한 것도 그 한 문장이 워낙 강렬하다 보니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그뿐만 아니라 니오의 철학에 대한 전반적인 얘기들도 그렇고 내가 오늘 질문이 좀 많을 것 같은데 어떡하죠? ㅎㅎ 부디 수다쟁이라 타박하지 마세요.
니오: 그럽시다. 그 궁금증 다 풀어드리리다. 뭐든 물어보세요. 자, 그럼 뭐부터 하실 테요? 시작해보시지요.
진리가 여성이라고 가정한다면 어떠한가? 모든 철학자가 독단주의자였을 경우 그들이 여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혐의는 근거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까지 그들이 진리에 접근할 때 가졌던 소름 끼칠 정도의 진지함과 서툴고 주제넘은 자신감이 바로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기에는 졸렬하고 부적당했다는 혐의는 근거 있는 것이 아닐까? 여성들의 호감을 사지 못했던 것은 당연하다(선악의 저편 서문).
지오: 니오의 책 [선악의 저편] 서문에 보면 진리를 여성에 비유한 게 참 인상 깊었습니다. 여자들은 자신들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쫓아오는 남자들처럼 집요하게 진리를 붙잡고자 하는 철학자들을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의미로 해석했는데, 그리 이해해도 되나요?
니오: 그렇죠. 모든 철학자들이 진리 접근 방식에 있어서 여자를 이해하지 못한 남자처럼 행동했다는 거지요. 그들이 진리로 나아간 수단은 진지함과 집요함이었는데, 더 심각한 건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로 그리한다는 것입니다.
지오: 진리가 여자라고 한다면, 여자들은 진리가 뭔지도 모르면서 집요하기만 한 철학자들을 싫어할 거다? 음… 벌써 재밌어지네요.
니오: 나는 지나치게 엄숙하고 진지함의 대명사인 철학자들의 진리 추구 방법이 아주 맘에 들지 않아요.
지오: 그건 동감. 나도 철학자들의 엄근진은 별로.
니오: 엄근진이 뭐요? 지오의 말은 참 어렵군요.
지오: 요즘 젊은이들은 SNS 상에서, 음… 니오는 모르는 게 너무 많네요. 그냥 따라오세요. 일일이 다 설명할 수 없으니… 암튼 말을 짧게 줄여서 하는 걸 좋아하지요. 엄근진은 방금 니오가 말한 ‘엄숙하고 근엄하며 진지한’의 첫 글자만 딴 말이에요. 주로 진지한 상황에 쓰이고 있지만 혼자 분위기를 잡는 사람을 비꼬는 경우에도 사용되지요. 니오가 싫어하는 철학자들의 모습을 얘기하기엔 이 단어가 딱인 듯한데요.
니오: 이해했소이다. 나는 왜 이리 똑똑한지. 자, 그럼 다시… 특히, 뭐 방금 그 엄근진의 최강 소크라테스가 하는 대화법을 한 번 봅시다. 상대방을 궁지로 몰아넣으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 방식은 정말 천박하기 그지없단 말이요. 자기도 모르면서 꼬투리를 잡아 계속 상대방에게 대답을 강요하는 그런 식으로는 진리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죠.
지오: 참, 니오의 고질적인 잘난 척이 또 나왔군요. ㅎㅎ 그래서 생각난 건데, 니오의 자서전 격인 책 <이 사람을 보라>의 목차 제목요. 어쩜 그렇게 스스로에게 도취된 제목을 쓸 수 있지요?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지’,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지’,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지’. 보통 사람 같으면 이런 오글거리는 제목은 그게 아무리 사실이라 해도 쓸 수 없을 것 같은데. 니오는 정말 자신감 하나는 인정입니다.
니오: 그게 왜요? 아니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말하는 게 뭐가 잘못됐을까요? 나는 그 <이 사람을 보라>라는 책에서 ‘어떻게 사람은 자기의 모습이 되는가?’를 얘기하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선 내가 누구인지를 밝혀두는 것이 반드시 필요했던 거요. 사실 사람들은 내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을 수도 있었지만… 나는 나를 ‘보여주지 않은 채 놔두지’ 않았으니.
지오: 그러고 보니 그 책 서문에 이런 말이 있었던 것 같아요. “내 말을 들으시오!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기 때문이오. 무엇보다도 나를 혼동하지 마시오!”
니오: 맞아요. 잘 기억하고 있군요. 사실 내 과제의 위대함과 동시대인의 비소함 사이에서 오는 오해는 사람들이 내 얘기를 들어보지도 않았고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는 사실로 나타나오. 나는 나 자신의 신용에 의거해서만 살아가지요.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한갓 편견일 수도 있지 않을까? …… 내가 살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식자’중 누구라도 붙들고 이야기해보면 된다…… 뭐 이런 생각이었달까.
지오: 세상 사람들이 니오의 생각을 알아주지 않는 상황에서 니오 본능의 긍지가 그렇게 거세게 저항을 한 결과가 바로 저 책인 거네요. <이 사람을 보라>는 결국 ‘나를 좀 제대로 보란 말이오!’ 이 말이군요. 니오의 생각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게 답답했던 거죠. 그렇다면 이제 그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것 같은데요. 지금은 니오의 철학에 많은 사람들이 영향받고 있으니까요. 특히 예술가들에게 니오의 철학은 정말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것 같아요. 물론 제 느낌이지만요.
지오는 이 위대한 철학자가 그토록 세상 사람들에게 말하고자 했던 생각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그 시대의 분위기를 떠올리며(정말 안쓰러울 정도로 사람들은 니체를 무시했고 인정하지 않았으니까) 니오의 말에 100% 공감하고 있었다. 그가 늘 강조했던 ‘자신으로 살라’라고 한 그 말대로 살기 위해 그는 그렇게 스스로도 고군분투했던 거다. 지오가 생각하기에 니체에게 더 큰 비극은 자신의 철학이 세상에 알려지고 사람들이 그의 진가를 알아보기 시작했을 때 그의 정신은 암흑 속에 갇혀버렸다는 것이다. 광장에서 말을 끌어안았던 그 사건 이후 10년이라는 그 기나긴 세월을 니체는 철저하게 혼자만의 세계 속에서 외로운 생을 지속해야만 했다. 바로 지오가 찾아간 니오가 처한 현실은 그러했다. 이 생각에 잠겨있던 지오, 그녀는 자꾸 멀리 가는 생각을 다시 눈앞의 니오에게 데려다 놓는다.
지오: 아쿠, 미안해요. 니오. 진리에 대한 얘기 하다가 그만 너무 멀리 와버렸네요. 가만있자. 아까 니오가 소크라테스를 돌려 까는 듯한 얘기를 하다 만 것 같은데..ㅎㅎ 니오는 소크라테스의 그 집요한 질문 방식도 맘에 안 든다고 했는데 그러면 철학은 어찌해야 합니까?
니오: 생각해 보세요.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은 너 자신으로부터 객관적이 되라는 것인데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나요? 보편적 이성으로부터 객관적인 것을 끌어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나는 난센스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어떤 사태를 바라봄에는 언제나 관찰자 자신이 포함되기 때문에 인식 주체로부터 분리된 완벽한 객관적 이성이란 불가능한 것이라는 말이죠.
지오: 그러고 보니 소크라테스가 지향한 학문적 인간은 이 불가능한 것을 요청한 것이군요.
니오: 자기 자신을 관찰할 줄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모든 인간에게 가장 먼 존재는 자기 자신입니다. 모든 예민한 사람들은 이 불편한 진리를 알고 있지요. ‘너 자신을 알라!’라는 이 ‘신의 입으로부터 인간을 향해 말해진 격언(?)’은 거의 악의적인 요구입니다.
지오: 흥분하신 것 같습니다. 제가 잘못했네요. 소크라테스! 그 이름을 내가 꺼내는 게 아니었는데…ㅎㅎ
니오: 자기 관찰이 절망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 무엇보다도 증언해주는 사실은 거의 모든 인간이 도덕적 행위의 본질에 대해 말하는 방식에서 알 수 있지요.
지오: 오.. 도덕적 행위. 바로 그겁니다, 그거. 오늘 내가 니오와 얘기 나누고 싶은 주제가 바로 선과 악, 도덕이지요. 흥분하셔서 그런지 지금 진도가 너무 빠르네요. 이게 벌써 나오면 안 되는데 ㅎㅎ 암튼 우리 엄근진을 벗고 오늘은 가벼운 마음으로 대화를 나눠봅시다.
니오: 진지함도 때로는 오만일 수 있지요. ‘철학자는 꿀을 모으는 꿀벌처럼 스스로 행복한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스스로 행복한 삶을 사는 자만이 행복에 대해 혼동하지 않는 법이니까. 춤추지 않고 지나간 하루는 그 하루를 제대로 살았다고 할 수 없고, 웃음이 동반되지 않는 진리는 진짜 진리라 할 수 없어요.’
지오: 세상에.. 가슴 뜨끔합니다. 꼭 나에게 하는 말 같아서. 정말 이 문장들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것 같네요. 비록 나는 철학자는 아니나 문밖에서 사유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걷고, 뛰고. 참… 사실 난 춤만 빼고 다 할 수 있긴 한데.. 음.. 그래도 자신은 없지만 춤추는 법도, 아니 무엇보다도 웃는 법을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니오: 철학은 가볍고 재미있게 해야 합니다. 철학이 결코 쉬운 영역은 아니지만 그것에 다가가는 방식은 즐거웠으면 좋겠어요.
지오: 그래서 그런가. 니오의 책은 제목부터 느낌이 다릅니다. 다른 철학서들 같은 딱딱함도 없고 서정적이면서도 유쾌함이 묻어난다고 할까. 나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 제목이 참 좋습니다. 이것 말고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선악의 저편], [아침놀], [즐거운 학문], [이 사람을 보라], [우상의 황혼]… 이러한 책 제목이 벌써 귀하의 학문을 대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듯합니다.
니오: 그렇습니까? 그렇게 봤다면 잘 본 것 같군요.
지오: 말하고 보니 지금 우리는 철학하는 태도에 대한 얘기만 한 것 같네요. 진리가 뭔지는 아직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궁금합니다. 진리가 대체 뭔가요?
모든 인간에게 가장먼건 자신의 존재라는것.. 너무나도 공감합니다. 다른사람의 영은 잘 보면서 저는 저를 보는게 너무 힘듭니다. 철학자는 꿀을 모으는 꿀벌처럼… 진리를 추구하는 과학자. 교육자, 사상가, 지식인들, 그리고 종교자, 영을 구하는 구도자.. 결국은 모든 사람들은 꿀벌처럼 살아야되는거 아닌가..지오가 소개시켜주는. 니오가 너무 좋네요.. 일주일에 한번씩 저희가 만나는 모임에 초대를 해야되지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저 한 문장을 읽었을 때 얼마나 공감이 되던지요. 정말 한동안 멍하게 앉아있었다는.
우리도 꿀벌처럼~ 살아보아요. 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