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과 걱정 잠시 묻어 두고 오랜만에 내 안에서 고요하게 머무는 여명의 새벽.
어젯밤 잠자리에 들 때 플레이되기 시작해 아직까지도 차분하게 내 귓전에 스미는 막스 리히터의 8시간짜리 자장가. 서늘하면서도 서정적인, 거기에 전자음의 몽환적인 음형과 가사 없는 여성 보컬이 어우러지며 편안한 쉼터가 되어준다. 이 음악은 웅크리고 옆으로 누운 채 들어야 맛이라나(아기처럼??). 음악은 풍경처럼 색다른 사색의 공간으로 나를 인도한다.
누구나 생에 한 번은 결정적 순간이 반드시 있다고 말한다. 자신의 오늘을 결정했다고 확신하며 그 순간을 떠올리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불현듯 내게도 묻고 싶어진다. 내 인생에서도 그런 결정적 순간이 있기는 했을까? 내 과거의 한 순간에 과녁을 겨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 안에 퇴적된 시간의 층에서 정작 중요한 순간은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이리 귀한 깨달음이라니^^). 결국 내 인생에서 결정적이라 의미 부여할 만큼의 그렇게 유난한 순간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내가 그런 각별한 기억 하나를 만들고 싶었을 뿐인지도.
돌이켜보니 나 역시도 습관처럼 늘 ‘현재의 나를 있게 한 아주 특별한 계기’가 하나의 선명한 점으로 떡하니 자리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지금 너무도 못나 보이는 나를 합리화하기 위한 그럴싸한 핑계거리를 찾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내 생에 그토록 중요했건만 다른 강렬한 순간에 밀려 기억 한옆에 시나브로 쌓여만 갔던 순간들은 의식하지도 못한 채… 지금의 나는 사실은 내 곁에 가만히 머물러준 그 모든 순간의 합이었을 텐데 말이다.
프랑스 작가 장 그르니에도 그랬다. 결정적 순간이 반드시 섬광처럼 지나가는 것은 아니라고. 겉보기에는 평범할 뿐인 여러 해의 세월을 유별난 광채로 물들이기도 한다고. 그렇게 한 존재의 참모습을 드러내는 건 점진적일 수 있다는 얘기다.
음악은 이제 타임머신이 되어 나를 기억 저편으로 데려간다. 시간을 늦추며 그 자체로 따사로운 풍경이 된다. 회상과 사색의 공간. 무거운 선율로 덧칠한 슬픔이 봉투처럼 그 안에 행복을 담고 있는 듯한 그의 음악은 그래서 평화롭다.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은 나는 그의 음악《Sleep》과 함께 긴 밤을 지새우곤 한다. 잠을 모든 사회적 정치적 질문들에 대한 저항 행위로 간주했던 막스 리히터는 8시간 반에 달하는 《Sleep》 프로젝트를 통해 그 저항정신을 표현했다고 한다. 현대인들에게 바쁜 삶만이 시간을 가장 유익하게 보내는 방법이냐고 묻는 이 멋진 독일 출신의 작곡가에게 나는 무언의 공감으로 답한다.
아니라고. 우리 삶에는 ‘결정적 순간은 몰라도 이렇게 한 걸음 멈춰야 하는 순간이 반드시 필요한 건 맞다’고. 그동안 지우고 싶었던 내 심연 속 삶의 조각들을 꺼내서 마주할 수 있게 음악이 선물해준 이 쉼터가 정말 고맙다. 그리고 내 인생에서 그 어느 순간도 버릴 게 없더라. 깊은 슬픔에 눈물겹던 그 숱한 날들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