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미술관에 전시된 것을 찍은 거라며 지인이 보내주신 사진 한 장. 수도 없이 많은 닳아빠진 신발들이 여기 저기 널려 있는 정말 신발만 가득한 사진이었다. 저 신발로 몇 채의 빌딩이 올라갔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찡하셨다고.
나도 문득 사진 너머 어딘가 있을 신발 주인들의 삶이 궁금해졌다. 주인은 간데없고 오롯이 신발들만 모여 있는 저 풍경을 보고 있자니 고흐의 <낡은 신발 한 켤레>라는 그림이 떠오른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노동을 통해 하루하루 삶을 이어가는 농부의 고된 생의 흔적이 농축된 사물”이라 평했다던 그 그림. 미술사학자 샤피로는 철학자의 그 비장하기까지 한 낭만적 상상력이 거슬렸던가 보다. 둘의 논쟁이 나 같은 그림 문외한에게도 들리는 걸 보면 말이다.
‘그림은 화가가 그리지만 해석은 감상자의 몫인데 논박할 것까지야’ 싶다가도 거기엔 또 내가 모르는 뭔가 있으려니… 같은 책도 독자 삶의 경험치에 의해 글이 다 다르게 읽히듯 그림도 그렇지 싶다. 나 역시 너무도 주관적인 나만의 감상을 하고 있는 중이고. 고급스러운 광이 나는 구두 앞에서도 이렇듯 많은 상념에 빠질까 의문을 던지며…
고흐는 자신이 땅을 밟고 걸어온 이 세상에 진 빚과 의무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그림의 형식을 빌어 어떤 기억을 남기고자 했다. 인간의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그림을 남기고 싶다고 했단다. 누군가에겐 그의 정물화가 사람 얼굴을 모델로 하는 초상화로 느껴지는 이유일 게다. 고흐가 지향했던 목표에 기대니 나에게도 저 허름한 신발 주인들의 고단한 발걸음과 힘겨운 삶이 보이는 것도 같다. 그들의 감정까지도…
고된 노동 속에서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나의 다정한 아빠는 자식들에게 늘 말씀하셨드랬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성실함이 얼마나 큰 무기인지를. 매일매일 할 일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크고 감사한 행복인지를 말이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열심히 사시는 아빠의 모습에서 자연스럽게 노동의 숭고함을 배우며 자란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인간이 혐오하는 것은 아무런 결과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노동인 거지 노동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진보와 빈곤》에서 헨리 조지가 강조했던 ‘인간이 부(富)에 대해 그토록 탐욕스럽게 된 것은 분배의 조건이 너무나 불공정하기 때문’이라던 그 말은 참으로 강렬했다. 나도 믿고 싶었던 것 같다. 노동을 통해 자신에게 충분한 몫이 돌아오리라는 확신만 있다면 인간은 더 열심히 더 잘 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루한 일상에서 활기를 유지하는 것은 강물을 거슬러 헤엄치는 것과 같다니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절망할까. 살면서 때로 그것이 불가피하다면 조용히 합리적으로 그리고 정당하게 절망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새해에는 묵직한 무게감을 견디며 의연하게 내딛는 모든 걸음걸음이 존중받고, 절망에서 출발하지 않고도 소소한 행복에 이르는 그런 날들이었으면 좋겠다. 지금 사는 이 세상이 슬픈 일, 속상한 일, 답답한 일이 많고 많지만, 그럴수록 두 발이, 두 손이, 두 눈이 협동하기로 되어 있는 존재인 우리가 한마음으로 연대하며 더불어 앞으로 나아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