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란 무엇인가> 오카 마리 지음, 김상운 옮김
2023년 10월 7일, 하마스가 주도하는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전투원들의 월경(越境) 기습 공격에 대한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이 시작되었다. 불과 2주만에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사망자는 4천 명을 넘어섰고 그 절반 가까이가 아이들이었다.
이렇게 시작되는 오카 마리의 <가자란 무엇인가>는 그 부제가 말하듯 ‘팔레스타인 문제의 역사적 맥락과 집단학살의 본질’을 제대로 꿰뚫고 있었다. 일단 먼저 교토대학 명예교수이자 현대 아랍문학, 팔레스타인 문제 및 제3세계 페미니즘 사상 전문가인 오카 마리 와세다 대학 문학학술원 교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이 책이 나오게 된 배경을 읽던 내게, 이 끔찍한 비극의 진실을 세상에 빨리 알리고 싶었던 그의 진심과 절박함이 오롯이 전달된 이유이리라. 나는 지식인의 책무가 바로 거기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직접적인 공격만이 목숨을 앗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인위적으로 조성된 기아로 인해 가자지구 주민 전체가 극심한 식량난에 빠져 있으며, …… 이스라엘은 또한 병원을 공격하고 의료진을 살해하는 등 조직적으로 의료 시스템을 파괴했습니다. …… 미사일에 의한 물리적 살상이 없더라도 생명이 자멸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상황이 인위적으로 조성되었고, 이러한 간접적인 죽음을 포함하면 사망자는 적게 잡아도 18만 6천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가자지구 총인구의 7.9%에 해당합니다.” p. 5~6
세상에서 가장 큰 감옥, 창살(지붕) 없는 감옥, 출구 없는 지옥… 이 표현들은 다 가자지구를 이르는 말이다. 현재 이스라엘이 고립시킨 그곳은 꼭 폭탄이 날아들어서가 아니라 하루하루의 삶 자체가 지옥인 형국인 거다. 오카 마리 교수는 가자지구에 대한 집단학살은 이 세계는 여전히 식민주의 국가들의 카르텔에 지배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 이스라엘에 대한 집단학살을 비난하지 않고 하마스의 테러만을 목소리 높여 비판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거다. 이 사태를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려고 하는 지적 행위를 ‘반유대주의’라고 비난하는 나라들은 다 과거의 식민 제국(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일본)과 정착민 식민주주의 나라들(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임을 분명히 밝혔다. 그는 이들 나라가 자신들의 식민지주의적 침략의 역사를 반성하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또한 정착민에 의한 식민지 국가이자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아파르트헤이트 국가라는 이 역사적 맥락이 보도에서 지워지고 있다고 말한다.
“식민주의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가자지구, 그리고 팔레스타인은 근대 500년의 유럽과 미국에 의한 전 지구적 식민주주의의 역사와 인종주의의 모순들이 응집된 토포스(장소)입니다.” p. 11
나는 이 책의 가치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결코 종교분쟁이 아니며, 우리는 이 사태를 ‘식민주의로서의 시오니즘’ 관점으로부터 역사적 맥락과 함께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오니스트들은 ‘신이 유대인에게 준 약속의 땅이다’라는 그들 자신의 종교적 열정에 이끌려 팔레스타인에서의 국가 건설을 계획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시오니즘에 대한 유대인의 지지를 끌어모으기 위해 정치적으로 성경의 신화적 이야기를 이용했습니다.” p. 65
우리가 시온주의, 시오니즘이라고 알고 있는 유태복고주의(猶太復古主義)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목적으로 한 민족주의 운동이다.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발생한 유대인 혈통의 프랑스군 드레퓌스 장교의 인권을 유린한 사건을 지켜본 유럽의 유대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유대계 오스트리아 언론인인 테오도어 헤르츨이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제1회 시온주의 세계대회를 개최하며 본격적으로 유대인 국가 건설 작업에 착수했다. 그리고 1948년 유대인 국가인 이스라엘이 건국되었다. 이것이 바로 팔레스타인 문제의 시작인 거다.
“20세기 전반기, 유럽 기독교 사회에서 면면히 이어져 온 유대인 차별의 역사, 그리고 근대 반유대주의의 정점을 이루는 사건으로서 나치 독일에 의한 유대인의 집단학살, 이른바 홀로코스트=쇼아가 일어납니다. 그 결과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럽에서 25만 명의 유대인이 난민이 되었다는 것은 이미 말했습니다. 이 유대인 난민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라고 할 때, 유엔이 취한 해결책이 ‘그래, 시오니즘이 있지 않은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나라를 만들겠다는 이 운동을 이용하자’라는 것이었습니다.” p. 67
이 <가자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하고 싶은 얘기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은 집단학살이라는 것이고, 세계의 언론은 동시대적, 중장기적인 역사적 맥락을 지워버린 채 보도함으로써 이 집단학살에 가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특정한 인종의 지상주의에 기초한, 인종차별을 기반으로 하는 국가라는 것과 국제사회는 지금까지 이스라엘이 저질러온 수많은 전쟁 범죄, 국제법 위반, 안보리 결의 위반을 단 한 번도 제대로 심판한 적이 없음을 지적하고자 함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불처벌, 이스라엘이 하는 짓은 무슨 일이든 묵인한다는 ‘전통’이 국제사회에 형성되어 있음을 비판하는 것이다.
“‘하마스의 공격은 진공 속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라는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의 말대로, 역사는 10월 7일에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에 앞서 이스라엘에 의한 인종청소와 오래 누적된 점령과 봉쇄와 아파르트헤이트 폭력의 역사가 있으며, 그 폭력 하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80년 가까이 인권을 부정당하고, 기본적 자유를 빼앗기고, 인간성을 억압당해 왔습니다. 인간은 그 본성 상 자유를 추구합니다. 현재 가자지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식민지 지배의 굴레로부터 해방을 요구하는 사람들과 어떻게든 식민지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섬멸의 폭력을 행사하는 식민지주의 국가 사이의 ‘식민지 전쟁’이나 다름없는데도, 일본을 포함한 서방 언론의 보도는 이런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고 있습니다.” p. 9
이 부분을 읽는 내 마음에도 분노가 일었다. 그동안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팔레스타인’이라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름을 눈에 담을 때마다 가슴이 아팠던 이유일 테다. 우리는 오카 마리 교수의 지적처럼, 팔레스타인 문제의 근원에 있는 이스라엘에 의한 점령, 봉쇄, 아파르트헤이트, 그리고 난민 귀환 이 모든 것들이 결국은 ‘정치적 문제’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는 나라의 독립이 정치적인 해결을 필요로 하는 정치적 문제인 것과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 문제는 정치적인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인위적으로 가자지구에 대규모 인도적 위기를 조성함으로써 본래 정치적 문제일 것을 ‘인도적 문제’로 바꿔치기하고 있습니다.” p. 197
공격이 있을 때마다 일단 그들을 살려야 하니 인도적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그대로 둔 채 파괴될 때마다 일시적인 원조만을 되풀이하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하지만 봉쇄와 점령이라는 정치적 문제와 씨름하지 않고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불법적인 점령과 봉쇄 속에서 어떻게든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적 지원을 한다는 것은 봉쇄와 점령에 대한 공범일 뿐입니다. 그래서 정치적인 해결을 해야 됩니다.” p. 198
이 책의 마지막에서, 오카 마리 교수는 ‘가자지구에 대해, 팔레스타인에 대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여러 가지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할 수 있다’라고 하는 것에는, 이 상황을 바꾸기 위해 어떤 실효성 있는 일을 할 수 있는가 또 해야 할 일 중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두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다만 무엇을 할 수 있는가보다는 오히려 지금 우리에겐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해야 할 것 많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선, 어쨌든 이 전쟁을 그만두게 하는 것입니다. …… 그것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미국 대사관 앞에 가서 항의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대사관 앞에 가서 항의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하는 것을 우리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 이 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가장 기본적인 것은 역시 올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우선은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 주세요. 어떤 형태든 상관없습니다. 또 인터넷에는 매우 이성적이고 균형 잡힌 기사들이 있습니다만, 그것은 중립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상황에서 ‘중립’이라고 말하는 것은 학살하는 쪽에 가담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p. 203
나는 오카 마리 교수가 지금 몸소 그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실천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스라엘 집단학살이 시작되자마자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사실을 알리고자 서둘러 강의를 열고,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인터넷에 올리고, 책으로 출판하고… 등등.
분노와 슬픔을 안고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책을 덮으면서, ‘그럼 난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도달했다. 나도 이스라엘 대사관 앞으로 달려가야 하나? 아니면 미국 대사관 앞으로? 지난 주말에 그 ‘달려감’의 힘을 몸소 체험했던 나로서는 이 책을 다시 읽는 지금 이 순간, 오카 하리 교수의 대답에 백프로 공감한다. 작년 하마스 공격에 대한 뉴스 보도를 떠올려보며 다시 한 번 언론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하마스의 월경 기습 공격이 있을 수밖에 없었던 그 맥락을 지워버린 보도 앞에서 역사에 무지했던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였던가. 거기에 과연 지금 이 시간에도 ‘살아 있는 죽음’ 속을 헤매고 있을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기도가 0.1초라도 섞여 있었을까?
‘가자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진짜로 질문할 것은 ‘이스라엘은 무엇인가’라고 말하는 저자의 말을 새길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이스라엘이란 국가를, 현재 그 나라를 이끌고 있는 총리 네타냐후를, 그 무도한 인간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고 있는 미국의 민낯을 제대로 알 필요가 있겠다. 이들을 떠올리며 답답해진 내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현실은 이렇게 비참하고 슬프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희망을 쓰는 일일 게다. 오카 마리 교수가 한국어판 서문에 썼던 마지막 문장처럼…
“‘절망’의 대명사인 ‘자자지구’를 ‘희망’으로 바꾸는 이들은 우리입니다.” p. 13
마지막으로 내 마음을 대변하는 듯한 시로 이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그리고 이 세상 어딘가에서 잠시 살다가 흔적도 없이 떠난 모든 이들을 이렇게라도 애도하고 싶다. 그곳에서는 행복하시기를.
작은 이름 하나라도 / 이기철
이 세상 작은 이름 하나라도
마음 끝에 닿으면 등불이 된다
아플 만큼 아파 본 사람만이
망각과 폐허도 가꿀 줄 안다
내 한때 너무 멀어서 못 만난 허무
너무 낯설어 가까이 못 간 이념도
이제는 푸성귀 잎에 내리는 이슬처럼
불빛에 씻어 손바닥 위에 얹는다
세상은 적이 아니라고
고통도 쓰다듬으면 보석이 된다고
나는 얼마나 오래 악보 없는 노래로 불러왔던가
이 세상 가장 여린 것, 가장 작은 것
이름만 불러도 눈물겨운 것
그들이 내 친구라고
나는 얼마나 오래 여린 말로 노래했던가
내 걸어갈 동안은 세상은 나의 벗
내 수첩에 기록되어 있는 모음이 아름다운 사람의 이름들
그들 위해 나는 오늘도 한 술 밥, 한 쌍 수저
식탁 위에 올린다
잊혀지면 안식이 되고
마음 끝에 닿으면 등불이 되는
이 세상 작은 이름 하나를 위해
내 쌀 씻어 놀 같은 저녁밥 지으며